이예원
[한국심리학신문=이예원(happymind0904@gmail.com)]

대형 기획사의 티저 하나에 억 단위 조회수가 붙는 시대다. 데뷔 전부터 광고판을 도배하고 온라인 커뮤니티에 바이럴 팀이 투입되는 게 요즘 아이돌 데뷔의 공식이다. 그런데 최근 K-POP 판을 흔드는 건 그 억 단위 자본이 아니다. 중소기획사 소속의 한 그룹 리센느(RESCENE)다. 화려한 데뷔도 없었고 물량 마케팅도 없었다. 있는 건 실력과 서사뿐이었는데 그게 통했다.
팬들이 붙인 이름이 있다. '노란장판 서사'. 원래 가난과 궁핍을 상징하던 단어가 이제는 정반대의 의미로 쓰인다. 자본의 도움 없이 바닥에서부터 스스로 증명해낸 사람에게 붙는 훈장 같은 표현이다. 이 단어 하나가 뒤집힌 걸 보면 지금 팬덤이 뭘 원하는지가 보인다.

무명 시절 영상이 뒤늦게 퍼지면서 판이 뒤집혔다. 초등학교 운동회 무대 작은 지역 행사 열악한 조명 아래서도 진심으로 노래하던 모습들. 유튜브와 숏폼을 타고 퍼진 이 영상들은 실력 논쟁을 잠재우고 입소문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입소문이 역주행으로 이어졌다. 흥미로운 건 이 역주행이 기획사가 설계한 게 아니라는 점이다. 대형 아이돌의 성공 서사는 대개 회사가 짜놓은 각본 위에서 소비된다. 반면 리센느의 서사는 멤버들의 자발적으로 발굴하고 편집하고 퍼뜨리면서 만들어졌다. 자발성 자체가 이 서사의 신뢰도를 끌어올린 셈이다.
왜 하필 이 서사에 눈물이 나는가
궁금한 건 여기서부터다. 왜 사람들은 이 그룹의 고생담에 이렇게까지 몰입하는가. 답은 두 갈래로 갈린다. 하나는 오래된 것이고 하나는 훨씬 실용적인 것이다.
오래된 쪽부터 보자. 한국 사회 저변에는 여전히 유교적 인과응보관이 흐른다. 적선지가 필유여경. 선을 쌓은 집에는 반드시 경사가 따른다는 뜻이다. 유교적 세계관에서 성공은 운이나 배경이 아니라 스스로 고난을 견디고 덕을 쌓은 결과여야 한다. 작은 무대도 허투루 하지 않았던 리센느의 태도는 이 틀 안에서 '덕을 쌓은 시간'으로 읽힌다. 고진감래라는 익숙한 서사 공식이 완성되는 순간 대중은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이건 새로운 감정이 아니라 판소리부터 사극까지 한국 콘텐츠 전반을 관통해온 오래된 서사 문법이 아이돌 산업에 그대로 이식된 것에 가깝다.
더 실용적인 설명도 있다. 심리학자 멜빈 러너가 제시한 '공정한 세상에 대한 믿음' 이론이다. 사람은 누구나 세상이 기본적으로 공정하다고 믿고 싶어 한다. 노력하면 보상받고 부정은 벌 받는다는 믿음. 문제는 현실이 그렇지 않다는 데 있다. 불평등한 출발선과 자본의 세습을 매일 목격하는 사람들에게 리센느의 성공은 드문 반례다. 자본 없이 실력과 진정성만으로 이긴 사례. 이 이론이 흥미로운 이유는 단순 감동을 넘어선 심리적 기능을 설명해주기 때문이다. 세상이 여전히 공정하다는 걸 확인받고 싶은 욕구가 채워지는 순간 사람들은 단순한 팬을 넘어 '증인'이 된다.
팬덤은 왜 자기 일처럼 우는가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가면 동일시가 보인다. 회사에서 노력이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 리센느의 성장은 대리 만족이 된다. 내가 지금 견디는 이 시간도 언젠가 보상받을 거라는 희망을 심어주는 셈이다. 실제로 이 그룹을 향한 팬 커뮤니티의 언어를 보면 유독 '나도 저렇게 버텨야지' 같은 자기 다짐성 문구가 자주 보인다. 아이돌을 응원한다기보다 자기 삶의 은유로 소비하는 방식이다.
그래서 이 팬덤에서 소비는 단순 소비가 아니다. 음원을 듣고 음반을 사는 행위가 '정당한 노력이 정당한 평가를 받도록 돕는' 실천으로 격상된다. 응원이 아니라 사명감이다. 이 사명감이 팬덤을 웬만한 결속력보다 단단하게 묶는다. 대형 팬덤이 흔히 갖는 소비적 결속과는 결이 다르다. 여기엔 일종의 도덕적 명분이 얹혀 있다. 우리가 이 착하고 실력 있는 사람들을 반드시 성공시켜야 한다는 명분. 이 명분이 굿즈 구매나 스트리밍 같은 지극히 소비적인 행위에 윤리적 정당성을 부여한다.
서사의 그림자
다만 이 서사가 마냥 아름답기만 한 건 아니다. '노란장판 서사'가 하나의 흥행 코드로 자리잡으면서 일부 기획사가 이를 마케팅 소재로 역이용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진짜 무명 시절의 고생과 연출된 고생 서사를 구분하기 어려워지는 지점이다. 팬덤이 감동하는 대상이 실제 인물의 서사인지 잘 짜인 스토리텔링인지 경계가 흐려질수록 이 서사의 순도는 떨어질 수밖에 없다. 리센느가 지금 받는 지지가 값진 이유도 여기 있다. 아직은 이 서사가 설계된 것이 아니라 발견된 것이라는 믿음이 유효하기 때문이다. 그 믿음이 언제까지 유효할지는 결국 이 그룹과 소속사가 앞으로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달려 있다.
자본이 놓친 것
거대 자본이 만든 스타는 눈을 사로잡는다. 하지만 마음까지 사로잡지는 못한다. 리센느의 급부상이 K-POP 산업에 던지는 질문은 결국 이거다. 대중이 정말 원하는 게 뭐냐는 것. 완벽하게 세팅된 기획사의 자본력이 아니라 그 안에서 숨 쉬는 사람의 진짜 궤적이라는 답이 지금 차트로 증명되고 있다.
작은 무대에서 시작해 큰 무대로 걸어 나온 이 그룹의 이야기는 결국 오래된 믿음 하나로 수렴한다. 노력한 사람은 언젠가 보상받는다는 믿음. 오늘도 누군가 리센느의 무대를 보며 눈물짓는 이유는 아마 이 믿음을 아직 놓고 싶지 않아서일 것이다.
<출처>
1. 김은하, 김도연, 박한솔, 김수용, 김지수 (2017). 한국어판 정당한 세상에 대한 믿음 척도(Belief in a Just World Scale: K-BJWS)의 타당화. 한국심리학회지: 상담 및 심리치료, 29(3), 689-710.
2. 심경섭, 이누미야요시유키, 윤상연, 서신화, 장양, 한성열 (2012). 유교가치관 척도 개발연구. 한국심리학회지: 일반, 31(2), 465-491.
3. 정재민 (2010). 청소년 팬덤 현상에 대한 근거 이론적 접근. 한국청소년연구, 21(3), 91-119.
4. 성다혜, 이형석 (2018). 인터넷 개인방송 BJ와 시청자 간의 의사사회적 상호작용, 사회적 거리감, 전문성이 PPL 효과에 미치는 영향: 설득지식모델을 중심으로. 융합사회와 공공정책, 11(4), 87-121.
5. 정득, 김은수, 이종석 (2017). 청소년의 팬덤활동과 자아존중감: 학습적응도의 조절효과. 청소년상담연구, 25(2), 343-3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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