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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심리학신문=편집부 ]
경기장 관중석에서 날아온 야유 한마디가 경기 결과보다 더 오래 기억에 남는 경우가 있다. 지난 1일 태국 2부리그 경기에서 일부 태국 관중이 박항서 감독을 향해 '김치맨'이라고 조롱한 사건이 뒤늦게 알려지며 국내외에서 공분을 샀다. 베트남 팬들이 '선을 넘었다'고 반응했고, 태국축구협회(FAT)까지 나서 공식 징계 절차에 돌입했다.
단순한 구호 하나가 왜 이토록 많은 사람의 감정을 건드렸을까. 그리고 그 조롱을 직접 들은 사람의 뇌 속에서는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심리학은 이미 오래전부터 그 답을 추적해왔다.
클로드 스틸 미국 스탠퍼드대 심리학과 명예교수가 1995년 정립한 '고정관념 위협(Stereotype Threat)' 이론에 따르면, 특정 집단에 속한다는 이유로 부정적 평가를 받을 수 있다는 신호를 감지하는 순간 뇌의 편도체가 즉각 활성화된다. 이는 신체적 위협을 받을 때와 거의 동일한 스트레스 반응이다.
실제로 매리 도셋 미국 미시간대 심리학과 교수 연구팀이 2019년 성인 24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실험에서 인종 비하 발언에 노출된 집단은 노출 직후 코르티솔 수치가 평균 28.3% 상승했고, 이 수치는 90분 이후에도 정상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몸은 이미 그 말을 싸워야 할 위협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더 불편한 사실이 있다. 본인이 직접 당하지 않아도 같은 집단에 속한 사람이 당하는 장면을 목격하는 것만으로도 동일한 뇌 반응이 유발된다는 것이다. 박항서 감독에 대한 조롱에 베트남 팬들까지 격분한 이유, 한국 네티즌들이 화면 너머에서 분노를 느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인종차별적 언행을 저지른 쪽은 흔히 '별거 아닌 농담'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데럴드 윙 수 미국 컬럼비아대 상담심리학과 교수는 이를 '미세공격(Microaggression)'이라는 개념으로 정면 반박한다. 미세공격이란 의도와 무관하게 특정 집단을 열등하거나 이질적인 존재로 규정하는 일상적 언행을 뜻한다.
수 교수 연구팀이 2021년 아시아계 미국인 51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 응답자의 72.5%가 '가볍게 여겨진 인종차별 발언'을 반복 경험했을 때 우울 증상이 유의미하게 심화됐다고 보고했다. 한 번의 '김치맨' 조롱이 가볍게 느껴질 수 있지만, 평생 비슷한 장면을 반복적으로 경험해온 사람에게는 그 한마디가 누적된 모욕의 방아쇠가 된다.
이를 심리학에서는 '누적 외상(Cumulative Trauma)'이라 부른다. 개별 사건은 작아 보여도, 그것이 쌓이면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TSD)와 유사한 증상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잇따라 발표되고 있다.
이번 사건에서 흥미로운 점은 분노가 한국인에게만 한정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베트남 팬들, 심지어 일부 태국 팬들까지 조롱에 반발했다. 조너선 하이트 미국 뉴욕대 스턴경영대학원 사회심리학 교수가 제안한 '도덕적 기반 이론(Moral Foundations Theory)'은 이 현상을 설명한다. 인간은 공정성과 존중이 침해당하는 장면을 목격할 때 강렬한 도덕적 분노, 즉 '의분(Moral Outrage)'을 경험하도록 진화했다는 이론이다.
2022년 국제학술지 '사회심리학과 개성과학(Social Psychological and Personality Science)'에 게재된 연구에 따르면 소셜미디어에서 인종차별 장면이 공유될 때 직접적인 당사자가 아닌 제3자의 공유 및 댓글 참여율이 직접 당사자보다 평균 41.8% 높게 나타났다. 목격자가 피해자보다 더 목소리를 높이는 이유는, 제3자는 불안이나 무력감 없이 순수하게 도덕적 감정에만 반응하기 때문이다.
스포츠 경기장은 이 같은 감정이 폭발적으로 증폭되는 공간이다. 집단적 흥분 상태에서는 평소보다 억제력이 낮아지고, 집단 정체성이 강화되면서 외집단을 향한 적대적 발언이 쉽게 튀어나온다. 이를 '탈개인화(Deindividuation)'라고 부른다.
당사자인 박항서 감독은 격분한 것으로 전해졌다. 심리학적으로 분노 반응은 건강한 신호이기도 하다. 케빈 오쉬이 미국 캘리포니아대 버클리 심리학과 교수 연구에 따르면 차별 경험 이후 분노를 표현한 집단은 무력감에 머문 집단보다 자존감 회복 속도가 평균 2.3배 빨랐고, 이후 수행 과제에서도 집중력이 유의미하게 높았다.
반면 조롱을 '그냥 참아야 하는 것'으로 내면화하는 경우 자기혐오와 수치심으로 이어질 위험이 있다. 특히 해외에서 활동하는 교민이나 운동선수처럼 소수자 위치에 놓인 사람들은 이 반복적 참음이 정체성 혼란과 만성 스트레스로 굳어지는 경향이 있다.
오늘 화면 너머에서 이 뉴스를 접하며 화가 치밀었다면, 당신의 감정은 정상이다. 아니, 아주 인간적이다. 그 감정이 불편하게 느껴질 때, 이것이 단순한 감정 과잉이 아니라 부당함에 반응하는 뇌의 정직한 신호임을 기억해두자. 그리고 주변에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이 있다면, '별거 아니야'라는 말 대신 '그 말이 진짜 상처가 됐겠다'라고 먼저 건네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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