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부

[한국심리학신문=편집부 ]
지난달 서울 역삼동 일대를 공포로 몰아넣은 연쇄 방화 사건의 피의자가 77세 노인이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많은 사람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 나이에 왜?'라는 의문이 댓글창을 가득 채웠다.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다. 우리 마음 깊은 곳에는 '노인은 온화할 것'이라는 고정관념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26명이 다친 이 사건은 단순한 방화가 아니다. 심리학자들은 이 사건을 노년기 누적 분노와 사회적 고립이 폭발한 전형적인 사례로 분석한다. 노년의 분노는 어떻게 이 지경까지 치닫는 걸까.
토머스 호번 미국 플로리다주립대 심리학과 교수는 2019년 성인 1400명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 노년기 분노가 청장년기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작동한다는 사실을 밝혔다. 젊은 세대는 분노를 자주, 짧게 표출하는 반면 60대 이상은 분노를 오래 억누르다가 한 번에 폭발시키는 경향이 51.8%나 더 높게 나타났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분노 반추(anger rumination)'라고 부른다. 같은 억울함과 좌절을 머릿속에서 반복적으로 되새김질하며 감정의 강도를 스스로 키워가는 현상이다. 특히 사회적 역할을 잃고 고립된 노인일수록 이 반추의 고리가 끊기지 않는다.
문제는 주변에 이 감정을 털어놓을 사람이 없을 때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2023년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65세 이상 독거 노인의 38.4%가 '정기적으로 대화를 나누는 사람이 없다'고 응답했다. 감정의 출구가 막힌 채 누적된 분노는 결국 예측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터진다.
에드윈 샤이드먼 미국 UCLA 심리학과 명예교수는 극단적 폭력 행동의 핵심에는 '심리적 통증(psychache)'이 있다고 설명했다. 이는 굴욕감, 좌절감, 소속감 상실이 한계점을 넘어설 때 발생하는 참을 수 없는 내면의 고통이다. 나이가 들수록 직업, 가족, 건강, 사회적 지위 등 삶의 통제감을 제공하던 요소들이 하나씩 사라진다.
통제감을 잃은 사람이 선택하는 극단적 방법 중 하나가 바로 '파괴를 통한 통제감 회복'이다. 로이 바우마이스터 미국 플로리다대 심리학과 교수는 자아 존중감이 극도로 낮아지고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할 때 인간은 현실을 '도피'하거나 '파괴'하는 방향으로 행동한다고 분석했다. 방화는 그 파괴의 가장 직접적인 형태 중 하나다.
실제로 경찰청 범죄 통계에 따르면 방화 사범 중 60세 이상 비율은 2018년 9.2%에서 2023년 16.7%로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고령화 사회로 접어들면서 노년기 정서 문제가 범죄로 이어지는 사례가 늘고 있다는 신호다.
많은 사람들이 이 사건에서 '나이'에만 주목했다. 하지만 심리학자들은 이런 반응 자체가 문제를 키우는 요인이라고 지적한다. '노인은 온화하다', '노인은 범죄와 거리가 멀다'는 고정관념이 노년기 정서적 위기를 사회가 일찍 발견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레베카 아치볼드 영국 옥스퍼드대 노인심리학과 연구원은 2022년 연구에서 노년기 분노와 공격성은 조기 개입이 이뤄질 경우 87%에서 완화될 수 있다는 결과를 발표했다. 문제는 주변 사람들이 '저 어르신이 설마?'라며 신호를 묵인하거나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데 있다.
우리 주변에도 오랫동안 불만을 속으로 삭히며 살아가는 어르신이 있을 수 있다. 최근 들어 유독 예민해 보이거나 이유 없이 짜증을 자주 낸다면, 그것은 단순한 성격 문제가 아닐 수 있다.
심리학자들은 노년기 폭력 충동의 가장 효과적인 예방책으로 '사회적 연결'을 꼽는다. 대단한 프로그램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정기적으로 안부를 묻는 이웃 한 명, 한 달에 한 번 얼굴을 마주하는 자녀 한 명이 누군가의 삶을 결정적으로 바꾼다. 미국 하버드대가 1938년부터 80년간 진행한 성인발달연구에서도 삶의 만족도와 심리적 안정감을 가장 강하게 예측하는 변수는 인간관계의 질이었다.
오늘 문득 오래 연락하지 못한 부모님이나 동네 어르신이 떠오른다면, 잠깐 전화를 한 통 드려보는 건 어떨까. 그 짧은 통화 한 번이 쌓이고 쌓인 분노의 무게를 조금씩 덜어낼 수 있다.
다른 곳에 퍼가실 때는 아래 고유 링크 주소를 출처로 사용해주세요.
http://www.psytimes.co.kr/news/view.php?idx=13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