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부

[한국심리학신문=편집부 ]
주말마다 팝업스토어를 찾아다니고, 숏폼 영상을 몇 시간씩 넘겼는데도 뭔가 허전하다. 맛집을 예약하고, 여행을 다녀오고, 새로운 취미도 시작해봤다. 그런데 왠지 모든 게 다 시들하다.
이 감각이 낯설지 않다면, 당신만 그런 게 아니다. 최근 '과잉형 권태'라는 개념이 2027년 주요 사회 트렌드로 주목받고 있다. 강렬한 경험을 쫓을수록 오히려 더 깊은 무기력에 빠지는 역설, 심리학은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까.
갤럽이 발표한 글로벌 직장인 조사에 따르면, 한국 직장인 중 일과 조직에 열정적으로 몰입하는 비율은 겨우 13.8%에 불과하다. 이는 조사 대상국 가운데 최하위권에 해당한다.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놀면서도, 정작 무언가에 깊이 빠져드는 감각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그만큼 많다는 뜻이다.
심리학에서는 이 현상을 '쾌락 적응(hedonic adaptation)'으로 설명한다. 처음 먹은 케이크는 황홀하지만, 열 번째 케이크는 그냥 케이크다. 뇌의 보상 회로가 반복되는 자극에 빠르게 둔감해지는 것이다. 문제는 현대사회가 이 적응 속도보다 훨씬 빠르게 새로운 자극을 쏟아낸다는 점이다.
에리카 카스텔로 미국 미시간대 심리학과 교수는 2022년 연구에서 고강도 자극에 반복 노출될수록 일상적인 즐거움을 감지하는 뇌의 민감도가 평균 31.4% 낮아진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쉽게 말해, 팝업스토어와 숏폼이 일상의 소소한 행복을 느끼는 능력 자체를 갉아먹는 셈이다.
권태의 핵심에는 도파민 시스템이 있다. 도파민은 '쾌락 호르몬'이라 불리지만, 사실 뇌과학적으로는 '기대와 추구'의 호르몬에 가깝다. 무언가를 얻었을 때보다 얻기 직전의 설렘 단계에서 훨씬 많이 분비된다. 숏폼을 넘기는 손가락이 멈추지 않는 이유, 팝업스토어 줄을 서는 행위 자체가 즐거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앤드루 허버만 미국 스탠퍼드대 신경과학과 교수는 과도한 외부 자극이 반복될 경우 뇌의 기저핵에서 도파민 기준선 자체가 낮아진다고 설명한다. 기준선이 낮아지면, 평소에는 충분히 즐거워야 할 경험도 '아, 이 정도야?'로 느껴지기 시작한다. 이전보다 더 강하고 새로운 자극이 있어야만 겨우 보통으로 느껴지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결국 뇌는 현재를 즐기는 대신 '다음 자극'만 기다리는 모드로 전환된다. 여행지에서 SNS 사진 찍기에 급급하고, 맛집에 앉아 이미 다음 맛집을 검색하는 행동이 여기서 비롯된다. 현재 순간을 느끼는 능력이 조금씩 사라지는 것이다.
권태는 전 세계적인 현상이지만, 한국에서 특히 두드러지는 데는 이유가 있다. 미하이 칙센트미하이 전 미국 클레어몬트대 심리학과 교수가 제안한 '플로우(flow)' 이론에 따르면, 인간은 자신의 능력에 딱 맞는 적당한 도전을 할 때 깊은 몰입과 행복을 경험한다. 너무 쉬워도, 너무 어려워도 몰입은 일어나지 않는다.
문제는 한국 사회가 '결과'를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니 과정에서의 몰입 경험 자체가 빈약하다는 점이다. 취미조차 '잘해야 한다', '인증해야 한다'는 압박이 붙는다. 달리기를 해도 페이스 기록을 SNS에 올려야 하고, 독서를 해도 완독 인증을 해야 직성이 풀린다. 경험이 수단이 되는 순간, 그 경험 자체에서 오는 만족감은 증발한다.
2024년 연세대 심리학과 연구팀이 성인 823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 여가 활동 중 '타인에게 보여주기 위한 목적'이 포함된 경우 활동 후 만족감이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평균 28.7% 낮게 나타났다. 즐거움을 위해 한 활동이 오히려 허탈함을 남기는 역설이 수치로 확인된 것이다.
심리학자들이 권태 해소를 위해 공통적으로 권하는 처방은 의외로 단순하다. 더 강한 자극을 찾는 대신, 지금 하는 일을 더 천천히, 더 세밀하게 경험하는 것이다. 이를 '감각 세분화(sensory differentiation)'라고 부른다. 커피 한 잔을 마실 때 향, 온도, 쓴맛의 질감을 의식적으로 하나씩 느껴보는 식이다. 뇌의 감각 감지 능력 자체를 다시 훈련하는 과정이다.
또한 '자극 단식(dopamine fasting)'도 효과적이다. 하루 한 시간, 스마트폰과 영상 콘텐츠를 완전히 끊고 멍하니 앉아 있거나 산책을 해보는 것이다. 처음엔 불안하고 지루하게 느껴지지만, 2주 정도 지속하면 뇌의 도파민 기준선이 서서히 회복된다고 허버만 교수는 설명한다.
오늘 당장 화려한 주말 계획을 취소하지 않아도 된다. 다만 지금 먹는 밥 한 숟갈, 창문 너머로 들어오는 햇빛 한 줄기를 잠깐 의식해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뇌는 생각보다 작은 것에도 반응한다. 심드렁함이 찾아올 때, 더 많은 자극 대신 지금 이 순간 한 가지에 살짝 귀를 기울여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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