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부

[한국심리학신문=편집부 ]
콘서트 티켓을 사기 위해 밤을 새우고, 생일 광고판 비용을 모으기 위해 적금을 깼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사람이 나의 헌신을 당연하게 여겼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어떤 기분일까.
최근 가수 허영생과 빅뱅 출신 탑이 잇달아 '팬 기만' 논란에 휩싸이면서 연예인과 팬의 관계를 둘러싼 뜨거운 논쟁이 불붙었다. 단순한 실망을 넘어 배신감, 분노, 심지어 자기혐오까지 느낀다는 팬들의 목소리가 쏟아졌다. 왜 우리는 이렇게까지 무너지는 걸까.
팬이 연예인에게 느끼는 감정은 단순한 동경이나 취미가 아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준사회적 관계(parasocial relationship)'라고 부른다. 존 호튼과 리처드 월 미국 로스앤젤레스 시립대 사회학과 교수들이 1956년 처음 제안한 개념으로, 미디어를 통해 반복적으로 접하는 대상에게 실제 인간관계와 유사한 감정적 유대를 형성하는 현상을 말한다.
문제는 뇌가 이 관계를 현실의 친밀한 관계와 거의 구분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미국 미시간주립대 심리학과 가브리엘 타베르나 교수 연구팀이 2021년 성인 1,039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연구에 따르면, 준사회적 관계에서 느끼는 소속감과 정서적 안정감은 실제 대인관계에서 얻는 것과 신경학적으로 거의 동일한 뇌 반응을 유발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즉, 팬들은 그저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 관계를 맺고 있다고 느끼는 것이다. 그러니 배신당했을 때의 충격도 현실 관계의 배신과 다름없이 아프다.
팬들이 느끼는 분노의 핵심에는 심리학의 '호혜성 원칙(reciprocity principle)'이 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자신이 준 만큼 돌려받기를 기대한다. 로버트 치알디니 미국 애리조나주립대 심리학과 명예교수는 그의 저서에서 호혜성을 인간 사회를 유지하는 가장 강력한 심리 원칙 중 하나로 꼽았다.
팬들은 시간, 돈, 감정 에너지를 아낌없이 쏟아붓는다. 그 대가로 기대하는 것은 거창한 보상이 아니다. '진심으로 대해주고 있다'는 최소한의 믿음이다. 허영생·탑 논란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난 것은, 팬들이 자신의 헌신이 당연하게 여겨졌다고 느꼈다는 점이다. 호혜성 원칙이 무너지는 순간, 뇌는 그것을 단순한 실망이 아닌 착취로 해석한다.
이때 분노는 '나를 무시했다'는 자존감 위협과 맞물리며 증폭된다. 사회심리학자들은 이를 '자기존중 보호 반응'이라 설명한다. 나의 선의가 조롱당한 것 같은 느낌, 그것이 탈덕 선언과 함께 터져 나오는 분노의 정체다.
흥미로운 점은, 배신당한 팬들이 즉각 등을 돌리지 못하고 오랫동안 갈등한다는 것이다. 이는 '매몰비용 오류(sunk cost fallacy)' 때문이다. 이미 쏟아부은 시간과 돈, 감정이 너무 커서 그냥 떠나는 것이 아깝게 느껴지는 심리다. '이제 와서 그만두면 그동안의 내 애정은 뭐가 되나'라는 생각이 떠남을 막는 것이다.
더 나아가 팬 활동은 개인의 정체성과도 깊이 연결돼 있다. 영국 에식스대 사회심리학과 에마 코헨 교수팀이 2022년 발표한 연구에서는, 팬덤 활동이 활발할수록 그 대상이 자아 개념의 일부로 통합되는 비율이 최대 61%에 달한다고 보고했다. '○○의 팬'이라는 정체성이 '나'의 일부가 된 상태에서 그것을 포기하는 것은 곧 나의 일부를 잘라내는 것처럼 느껴진다.
탈덕이 선언이 아니라 애도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많은 팬들이 단순히 화가 난 것이 아니라 진짜로 슬프다고 말하는 것은 과장이 아니다.
준사회적 관계는 본질적으로 비대칭적이다. 팬은 연예인을 깊이 알고 있다고 느끼지만, 연예인은 팬 개개인을 알지 못한다. 이 비대칭성이 착취의 구조로 흘러갈 위험이 있다는 것을 심리학자들은 오래전부터 경고해왔다. 연예인이 이 관계의 특성을 이해한다면, 팬의 감정이 얼마나 실질적이고 취약한지를 외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결국 허영생·탑 논란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하나다. 사랑받는 위치에 있는 사람은 그 사랑에 어떤 방식으로 응답해야 하는가. 오늘, 오랫동안 좋아해 온 누군가를 여전히 응원하고 있다면, 그 감정이 얼마나 진지하고 소중한 것인지 스스로 한 번 알아줘도 좋다. 당신의 팬심은 가볍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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