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수빈
[한국심리학신문=윤수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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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은 안 했는데 번아웃이 와서, 그냥 아웃이다.”
최근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밈처럼 유행하는 이 문장은 단순한 웃음을 넘어 많은 이들의 속마음을 대변한다. ‘사실 별로 열심히 산 것도 없는데 왜 이렇게 지칠까’라는 생각, 어쩌면 당신도 해본 적 있을 것이다.
보통 번아웃은 과도한 일, 지나친 헌신, 장시간 노동 등 ‘너무 열심히 해서 생긴 탈진’으로 여겨진다. 그래서 열심히 살지 않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번아웃을 경험할 때, 스스로가 더 의아해지고, 나약한 건 아닌지 자책하게 된다. 그러나 심리학은 말한다. 정신적 탈진은 반드시 외적 성과나 과로의 결과만은 아니다. 그 안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지침과 감정 노동이 쌓여 있다.
‘정서적 소진’은 과로 없이도 발생한다
미국심리학회는 번아웃을 “만성적 스트레스 노출에 따른 감정적 탈진(emotional exhaustion), 냉소주의(depersonalization), 자기 효능감 감소(reduced personal accomplishment)의 조합”으로 정의한다. 여기서 중요한 건 ‘정서적 탈진’이 핵심 지표라는 점이다.
심리학자 크리스티나 마슬라크(Christina Maslach)는 번아웃을 연구하며 “사람은 외적 행동보다 내면에서의 지속적인 긴장과 통제감 결여만으로도 탈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즉, 외적으로 겉보기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사람도, 자신을 꾸짖는 생각, 계속 ‘해야 한다’는 압박, 미래에 대한 불안에 사로잡혀 있다면 충분히 번아웃을 경험할 수 있다는 말이다.
또한 《Harvard Business Review》는 번아웃의 주요 유발 요인 중 하나로 '성과 압박과 기대 불일치’를 꼽는다. “스스로 기대하는 삶과 현재 상황이 괴리될 때, 사람은 더 쉽게 무기력감과 탈진을 경험한다”고 지적한다. 즉, 무언가 이루지 못했다는 현실만으로도 우리의 뇌와 감정은 지쳐간다.
‘아무것도 안 했는데 지친다’는 말은 사실이다
이 말은 단순한 기분 탓이 아니다. 현대 사회 구조가 사람들을 끊임없는 비교와 자기검열의 상태에 놓이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심리학자 레온 페스팅거(Leon Festinger)의 사회적 비교 이론(Social Comparison Theory)에 따르면, 사람은 끊임없이 타인과 자신을 비교하고, 그 비교가 우울감·자기비하·탈진을 유발한다. SNS는 이 과정을 극대화한다. 미국 펜실베이니아대의 2018년 연구에 따르면, 하루 30분 이상 SNS를 사용한 집단은 그렇지 않은 집단보다 우울감·불안·외로움을 더 강하게 느꼈다.
또한 생산성 강박(productivity guilt) 역시 작지 않은 요인이다. 저널리스트 앤 헬렌 피터슨은 "현대인의 번아웃은 단순히 과로의 문제가 아니라, ‘일하지 않는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내면의 압박’에서 비롯된다"고 지적한다. 특히 밀레니얼 세대는 쉬는 동안에도 ‘무언가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불안에 시달리며, 그 자체로 정서적 에너지를 소모한다.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지치는 상태가 반복된다.
반복되는 무기력은 ‘학습된 감정’일 수 있다
무기력과 탈진은 종종 통제감 상실에서 비롯된다. 심리학자 마틴 셀리그만(Martin Seligman)은 고전적인 개 실험을 통해 ‘학습된 무기력(learned helplessness)’ 개념을 제시했다. 반복적으로 통제할 수 없는 고통(예: 피할 수 없는 전기자극)을 받은 개들은 나중에는 피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게 되었다.
이 개념은 인간에게도 적용된다. 무언가를 시도했지만 실패하거나 결과가 없었던 경험이 반복되면, 사람은 점점 ‘나는 뭘 해도 안 돼’라는 감정에 빠진다. 그러면서 시도 자체를 멈추게 되고, 무기력과 자기비난이 맞물려 탈진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에 빠진다.
이 때의 번아웃은 ‘열심히 살아온 결과’가 아니라, 열심히 살아보려 애썼던 흔적들 속에서 반복된 좌절이 만든 그림자다.
마무리하며
열심히 하지 않았는데도 번아웃이 오는 건,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심리학적 관점에서 보면, 이는 충분히 예측 가능한 현상이다. 우리는 ‘일하지 않아도’, ‘성과를 내지 않아도’, ‘그저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지칠 수 있다. 특히 정서적 압박, 성공에 대한 강박,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이 겹쳐진 시대에선 더더욱 그렇다.
불타오르지 않아도 탈진할 수 있다.
자신에게 이렇게 말해도 괜찮다.
“나는 지금,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지칠 수 있는 상황 속에 있다.
그리고 그건 이상한 일이 아니라, 너무 당연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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