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디어는 욕실에서 태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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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심리학신문=고예림 ]




쓸모없는 선물 나누기, 아니, 쓸모 '있을지도 모를' 선물 나누기


친구들과 '쓸모없는 선물'을 주고받는 이벤트를 열었다. 평소 잘 들어가 보지 않던 카테고리의 물건들을 찾아 헤매며, 최대한 무용한 것들을 고르고 싶었다. 하지만 어느새 사고 싶은 물건들만 장바구니에 쌓여 가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나는 사실 '쓸모없는 물건'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어떤 물건이든 제 주인을 만나면 그 나름의 쓰임을 갖게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완전히 무용한 물건을 고르기보다는, 나름의 의미와 아이러니가 섞인 중간지대에 놓인 것들을 찾고 있었다.


위메프 사이트에 올라온 방수 메모지

그때 발견한 것이 하나의 메모지였다. 처음엔 그냥 넘길 뻔했다. 메모지는 너무도 '쓸모 있는' 물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제품은 달랐다. 이름부터 기묘하다. "샤워 노트북 방수 메모장 빗속의 보드 화이트 욕실 목욕 아쿠아노트." 이토록 긴 이름. 방수 메모장이라니, 기발했다. 하지만 예감이 왔다. 이 물건도 결국 다른 메모지들과 다를 것 없이 수납장에 처박힌 여러 메모장 중 하나가 될 것이다. 


가격도 3만 원 후반대. '쓸모없는 선물'로 치기엔 적잖은 돈이다. 망설였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어떤 장면이 떠올랐다. 영어 자격증 스피킹 시험을 준비하던 시절이었다. 자투리 시간 하나도 아까워서, 심지어 샤워를 하면서도 하루 있었던 일을 영어로 말하는 연습을 했었다. 그때의 나는 샤워 부스 안에서 나와 대화하며 어설픈 문법과 발음을 다듬고 있었다. 그리고 샤워를 마치고 나면, 그 사이 떠올랐던 표현이나 아이디어를 잊지 않으려고 부리나케 화장실에서 나와 메모를 하곤 했다. 유레카! 아르키메데스가 옷도 입지 않고 거리로 달려나간 심정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겠다. 


그 경험이 문득 떠올랐다. 그 메모지는, 내게 정말 유용했을 수도 있다.

 



유레카는 물줄기와 함께 온다


샤워하면서 기발한 아이디어가 떠오른 적이 있는가? 누군가는 그것을 우연이라 여기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실제로 '블랙 스완'의 저자이자 리스크 이론가인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는 "책의 핵심 개념은 샤워를 하다가 정리됐다"며, "샤워는 철학적으로 가장 효율적인 공간"이라 말했다.


뇌가 기발해지는 순간, 그 핵심에는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Default Mode Network, DMN)'라는 신경망이 있다. 하버드대와 UCLA 등에서 진행된 뇌과학 연구에 따르면, 사람이 샤워하거나 산책, 배변처럼 외부 자극이 적고 긴장을 푸는 활동을 할 때, 이 DMN이 활성화된다. 우리가 아무 일도 하지 않을 때, 뇌는 오히려 가장 바쁘게 작동한다.


뇌의 DMN

DMN은 그동안 쌓아둔 기억, 감정, 정보를 조용히 연결한다. 이때 창의적 사고, 문제 해결력, 내적 통찰이 발생한다. 2022년 진행된 "The default network is causally linked to creative thinking" (Ben Shofty 외, Molecular Psychiatry, 2022) 연구에서는, 수술 중 깨어 있는 환자의 DMN 부위에 전기 자극을 가하자, 창의적 과제를 수행하는 능력이 급격히 떨어지는 현상이 관찰됐다. DMN이 창의력과 직접적으로 연결돼 있다는 강력한 증거다.


샤워는 반복적이고 자동적인 행동으로, 뇌의 인지 자원을 거의 쓰지 않는다. 그래서 DMN이 자유롭게 작동할 여지를 준다. 그 결과 우리는 샤워 중 막혔던 생각이 풀리고, 잊고 있던 단어가 떠오르며, 때로는 '유레카!'의 순간을 맞는다.

 



생각은 멍 때릴 때 무르익는다 – 잠복 효과


이처럼 문제에서 잠시 벗어나 있을 때 아이디어가 떠오르는 현상은 심리학에서 '잠복 효과(Incubation Effect)'라고 불린다.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리는 동안, 마음은 방황하고 무의식적인 연상 작용이 일어나며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정보들이 연결된다. 그렇게 해서 문득,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해답이 떠오르는 것이다.


2019년 Psychological Science에 발표된 연구에서, 심리학자 조너선 스쿨러와 동료들은 전문 작가와 물리학자들에게 2주간 일기를 쓰게 하며, 가장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언제 떠올랐는지를 기록하게 했다. 그 결과, 중요한 아이디어의 약 20%가 업무 외 활동 중, 즉 딴생각을 하고 있을 때 떠올랐다.


더 흥미로운 점은, 이렇게 딴생각 중 떠오른 아이디어일수록 '아하!'의 감정과 함께 등장했고, 교착 상태에 빠졌던 문제에 돌파구가 되어준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다.

 



뇌에 여유를 줄 용기


밴쿠버 브리티시컬럼비아 대학교의 인지신경과학자 칼리나 크리스토프는 이렇게 말한다. "플러그를 뽑고, 정기적으로 생각을 정리하고, 생각할 시간을 갖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마음에 여유를 주는 행위는 창의력에 대한 투자이며, 그것은 결코 낭비가 아니라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가 가장 열심히 머리를 쓰려고 애쓸 때보다, 아무 일도 하지 않을 때 우리의 뇌는 더 깊이 사고하고 더 멀리 도달한다. 그러니, 샤워 중에 떠오른 아이디어를 적을 수 있는 메모장은 결코 쓸모없는 선물이 아닐지 모른다. 오히려 우리의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를 위한 가장 정직한 투자일지도. 








*참고문헌

1) 박진아, 왜 화장실에서는 좋은 아이디어가 더 많이 떠오를까?, 시선뉴스, 2025.07.15., https://www.sisu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26670

 2) Stacey Colino, The science of why you have great ideas in the shower, National Geographic, 2022.08.12., https://www.nationalgeographic.com/magazine/article/the-science-of-why-you-have-great-ideas-in-the-shower?utm_source=chatgp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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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5-08-25 08:3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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