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빈
[한국심리학신문=채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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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야심한 밤, 필자의 친구가 이렇게 말했다.
“우정은 벼고, 사랑은 주식같은거야.”
언뜻 보면 평범한 농담처럼 들려 필자 역시 모르게 미소지었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 말에는 인간 관계의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다. 벼는 봄에 심어 여름을 지나 무더운 태양빛과 땀을 거친 뒤에야 가을에 비로소 수확할 수 있다. 햇빛, 물, 그리고 부지런한 농가의 손. 이 모든 것이 오랜 시간에 걸쳐 쌓여 비로소 결실을 맺는다. 반면 주식은 다르다. 하루가 다르게 오르내리다 예기치 못한 호재나 악재, 가끔은 말도 안되는 이유로 가격이 급격히 변동하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사랑이란 관계는 순간 강렬하게 불타오를수도, 한순간에 불타 없어질 수도, 동시에 불안정하게 흔들 수 있다. 반면 우정은 오랜 시간에 걸쳐 서서히 신뢰를 쌓고 공고히 해 나간다는 특징이 있다.
이들의 차이는 인간 관계 중 사랑 등을 다루는 심리학 이론들을 통하여 설명할 수 있다. 사회심리학자인 버나드 머스타인(Bernard I. Murstein)은 인간 관계 형성과 발전 과정을 자극-가치-역할 이론(Stimulus-Value-Role Theory, SVR)으로 설명했다. 사람들은 우선 외적인 자극에 의해 관계를 쌓는 것을 시작으로 시간을 들여 가치관이나 태도를 비교해 최종적으로는 서로의 역할을 조정하여 관계의 지속이나 강도를 설정해나간다는 것이다. 머스타인이 제시한 이 틀의 관점에서 보면 친구의 말이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심리학적으로 논리있는 근거를 바탕으로 한 통찰임을 알 수 있다.
1단계 : 자극 - 첫인상이 만들어내는 불꽃
인간 관계가 형성되는데 있어 그 모든 것의 출발점은 바로 자극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처음 보는 사람의 외모나 표정, 말투, 사회적 지위, 그리고 분위기와 같은 외적 요인에 의해 상대방에게 호의를 느끼거나 거부감을 느낀다. 이 단계는 특히 사랑에 있어서 강렬하다. 대화 속에서 느낀 호감, 거리를 걷다가 우연히 나눈 시선, 그리고 이어지는 작은 배려. 자극 단계가 가지는 강력함은 상대에게 강하게 이끌려 단기간만에 급속히 가까워져가는 현상에 있다. 이것은 주식 시장에서 단기간의 급등락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호감이라는 이름의 ‘호재’가 작동하면 마음은 빠르게 고양되지만 기초 체력이 부족하면 쉽게 무너질 수 있는 것이다.
반면 우정은 조금 다른 과정을 가진다. 첫인상은 좋을지라도 반드시 강렬한 매력이 필요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말을 많이 나누지는 않더라도 같은 지역, 직장, 교실이나, 동아리 활동 등에서 우리는 경험과 시간을 공유함으로써 상대에게 조금씩 친근감이 생기고 관계는 깊어진다. 이것은 흙 속에서 벼가 천천히 싹을 틔우는 과정과 닮았다고 볼 수 있다.
2단계: 가치 - 관계의 지속을 판단하는 필터
자극이 아무리 강렬할지라도 자극만으로는 관계를 유지하기는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사람들은 시간이 지나 관계가 익숙해져가면서 처음에 가진, 이미 익숙해져버린 자극을 넘어 상대방과의 가치관, 생활 습관, 태도와 같은 요소들이 자신과 얼마나 맞는지 재고하기 시작한다. 이 단계에서는 서로 공통점이 많을수록 관계는 안정되고, 그 차이가 클수록 충돌 가능성이 높아진다.
연애 과정에서 흔히 있는 충돌은 바로 이 가치 단계에서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연애 초기, 그리고 가치 단계에서는 소위 ‘콩깍지가 씌었다’는 말처럼 상대방이 모든 면에서 사랑스럽고, 그저 귀엽고 훌륭해 보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사소한 부분들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나중에는 금전 감각, 정치적 견해, 종교, 언행, 가족 관계에 대한 생각 등과 같은 현실적인 면에서 차이를 느끼기 시작한다. 결국 이러한 차이를 기간 안에 메우지 못하면 아무리 강렬한 첫인상을 가지고 있었더라도 시간을 들여 상대와 관계를 유지하기에는 부족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마치 기업이 매력적이게 보일때 단기적인 주가 급등이 발생하더라도 기업의 실질 가치가 빈약하면 결국 하락장을 맞는 것처럼 말이다.
우정에서는 이 가치 단계가 관계의 성숙도를 결정짓는다고 볼 수 있다. 우리 주변을 둘러보면 친한 친구일수록 취미, 습관이나 태도, 취향 그리고 성격이 잘 맞는 경우가 많다. 또한 비록 서로의 가치관이 달라 충돌이 발생하더라도 그것을 존중하고 조율할 수 있는 힘이 있다면 우정은 더욱 오래 지속되어가는 근거를 가지게 된다. 벼농사를 할때 비가 많이 오면 물을 조절하고, 햇빛이 너무 강하면 잠시나마 그늘을 만드는 것과 같이, 우정은 여러 상황 하에서도 서로를 이해하는 과정을 통해 강해진다.
3단계: 역할 - 관계의 안정을 결정하는 마지막 관문
마지막 단계는 역할 조정이다. 이것은 서로가 어떤 위치에서 어떠한 역할을 맡는지를 명확히하고, 확인하는 과정이다. 친구라면 어려울 때 의지할 수 있는지, 함께 기쁨을 나눌 수 있는지, 그리고 서로의 성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파트너인지가 중요하다. 연인 관계에 있어서는 이것이 더욱 뚜렷하다. 연인 관계가 장기적인 안정으로 가기 위해서는 인생의 동반자로서 책임과 역할을 공유할 필요가 있다. 인생에서의 역할, 대립의 해결 방법, 그리고 미래의 계획이 일치하고 있을 때 관계는 진정한 의미의 안정을 획득한다. 이것은 농가가 벼농사를 끝까지 완수해 풍부한 결실을 얻는 것과 같은 과정이라고 할 수 있겠다.
우정과 사랑의 차이점, 그리고 공통점
우정과 사랑은 모두 자극, 가치, 역할의 단계를 거치지만 그 차이는 중시하는 부분과 그 속도에 있다고 설명할 수 있다. 사랑에는 폭발적인 자극 단계가 있다. 이 관계는 빠르게 발전하지만 가치 단계와 역할 단계를 통과하지 못하면 쉽게 파국을 맞는 위험에 빠질 가능성이 높아진다. 때문에 사랑은 곧 주식이라 비유할 수 있던 것이다. 반면 우정은 가치와 역할의 단계를 그 관계의 축으로 두고있다. 우정이라는 것은 천천히 자라지만 안정되고 오래 지속된다. 마치 벼농사처럼 인내와 뜨거운 태양빛 아래 땀이 흐르는 것과 같은 노력이 필요하지만 한번 자라면 풍성하게 여물어나 금빛 바다를 이룩하듯이 말이다.
이러한 차이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중요한 메시지를 던진다. 사랑이든, 우정이든, 혹은 그 밖의 무수해서 설명할 수도 없는 관계들이든지 결국 그 출발점은 단순한 계기나 순간적 자극에서 비롯될 수 있다. 그러나 그 관계가 오래토록 지속되기를 바란다면 결국 가치와 역할의 단계에서 검증을 거쳐 통과되어야 한다. 외모나 매력, 분위기, 혹은 달콤한 말과 같은 피상적인 요소만으로는 관계가 언제든 불안정한 상태에 머무르게 된다. 때로는 그런 토대의 취약함이 관계의 단절로 이어지기도 한다. 반대로, 오랜 시간에 걸쳐 축적된 신뢰와 공통된 가치의 공유는 관계가 위기를 맞더라도 쉽게 흔들리지 않는 든든한 기반이 된다.
우정은 벼, 사랑은 주식
필자의 친구가 나지막이 했던 말처럼 “우정은 벼, 사랑은 주식”이다. 처음 들으면 가볍고 농담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자세히 생각해보면 인간관계의 본질을 간파한 통찰에 가깝다. 벼처럼 묵묵히 시간이 쌓이며 길러지는 우정은 안정적이고 꾸준하다. 반면 주식처럼 변동성이 큰 사랑은 때로는 빠른 상승을, 때로는 급격한 하락을 경험하기도 한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자극-가치-역할 이론은 바로 이런 차이를 잘 설명한다. 비록 자극-가치-역할 이론이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론이기 때문에 우정을 논하기는 어려울 수 있다는 점은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결국 우정과 사랑은 비슷한 결을 띈다. 왜냐하면 결국 관계는 단순한 자극에서 시작되지만, 가치와 역할을 공유하는 과정을 통해서만 깊어지고 견고해지기 때문이다. 이 과정 속에서 우리는 건강한 관계를 형성하고 유지하는 방법을 배우고, 또 자신을 성찰할 기회를 얻게 된다.
우정은 벼처럼 천천히 성장하고 마침내 황금빛의 아름다운 결실을 맺는다. 반면 사랑이라는 감정은 주식처럼 순식간에 불타오를 수 있지만 적절하게 관리되지 않으면 쉽게 흔들리고 만다. 그러나 사랑 또한 가치와 역할의 단계를 넘어서면 단기적 투기를 넘어선 장기적 투자 가치를 가지게 되는 주식과 같이 안정적인 동반자로 성장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인간 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끊임없는 자아성찰과 배려라고 볼 수 있다. 인간 관계라는 것은 마치 벼처럼 정성스럽게, 오래토록 길러지는 것이든 주식처럼 전략적으로 투자되는 것이든 이 모든 것의 본질은 서로에 대한 이해와 책임에서만 그 결실을 맺을 수 있기 떄문이다.
따라서 친우의 통찰은 세상 수많은 이들과 관계를 맺어가는 우리들에게 마지막 한 문장으로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이해와 책임을 다할 준비가 되었는가?”
참고문헌
1) 원충렬, "브랜딩, 연애에서 배우자, The PR, 204.10.10
2) 최하승, "[최하승의 The Book] 연애에도 법칙이 존재한다", 경남연합일보, 2008.09.01
3) 심영섭, "들이댈 용기가 없다면 떳떳해지든지", 한겨례, 2011.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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