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하은
[한국심리학신문=김하은 ]

코로나19 팬데믹이 전 세계를 강타하던 시기, 많은 사람들이 알베르 카뮈(Albert Camus)의 소설 『페스트(La Peste)』를 다시 집어 들었다. 전염병이라는 특수하고도 극단적인 상황 속에서 인간의 본성과 사회의 민낯을 날카롭게 드러낸 이 작품은, 바이러스가 아닌 인간 심리의 전염성을 돌아보게 만들었다. 『페스트』는 알제리 해안에 위치한 프랑스령 상업도시 ‘오랑’을 배경으로 한다. 평범한 일상과 관성적인 도시의 삶이 이어지던 어느 날, 거리 곳곳에서 죽은 쥐들이 발견되기 시작한다. 시민들은 불길함을 느끼면서도, 그것이 큰일로 번지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곧이어 사람들 사이에서도 원인 모를 고열과 토혈 증세가 퍼지면서 도시 전체가 공포에 휩싸인다. 페스트, 즉 흑사병이 도시에 침투한 것이다. 도시 당국은 급기야 도시 봉쇄를 단행하고 외부와의 모든 연결을 차단한다. 폐쇄된 도시는 ‘고립’이라는 또 다른 감염병에 걸린 듯하다. 처음엔 ‘이 또한 곧 지나가리라’는 낙관이 지배적이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불안과 공포, 분노와 절망이 도시를 뒤덮는다. 사람들의 태도는 제각기 달라진다. 누군가는 공동체의 안전을 위해 희생을 감수하고, 누군가는 현실을 부정하며 도피하려 하고, 또 다른 이는 절망 속에서 무력하게 무너진다. 이러한 인간 군상들의 반응은, 단순히 성격 차이 때문만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현실을 ‘어떻게 해석하느냐’, 즉 어떤 신념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반응은 극명하게 달라진다. 이 지점에서 심리학자 앨버트 엘리스(Albert Ellis)의 ‘합리적 정서 행동 치료(REBT)’ 이론이 유의미하게 연결된다.
앨버트 엘리스는 인간이 이성과 감성을 모두 지닌 이중적 존재라고 보았다. 즉, 인간은 합리적 사고를 할 수 있는 동시에, 비합리적인 신념에 쉽게 휘둘릴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의 이론에서 핵심은, 우리가 겪는 감정 반응이나 행동은 ‘사건(A)’ 그 자체 때문이 아니라, 그 사건에 대해 우리가 가진 ‘신념(B)’에 따라 결정되며, 이 신념이 결국 ‘결과(C)’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이를 ‘ABC 이론’이라고 한다.
* A (Activating Event): 사건, 외부 자극 (ex. 팬데믹, 도시 봉쇄 등)
* B (Belief): 그 사건에 대한 개인의 신념 또는 해석
* C (Consequence): 신념이 유발한 감정 및 행동의 결과
따라서 동일한 사건이라 하더라도, 각 개인이 가진 신념의 차이에 따라 전혀 다른 반응이 나타난다. 『페스트』 속 인물들을 살펴보면 이 이론이 어떻게 적용되는지 명확해진다.
젊은 기자 랑베르는 취재차 오랑에 왔다가 도시 봉쇄로 갇히게 된다. 그는 이 도시의 시민도 아니고, 연인은 다른 도시에 있다. 처음엔 “나는 이 사태와 무관하다”는 신념 아래 어떻게든 도시를 빠져나가려 한다. 그는 밀수업자와 접촉하며 불법 탈출을 시도하는 등, 극단적인 방법도 마다하지 않는다. 이때 랑베르가 가진 비합리적 신념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 곁에 있어야만 행복할 수 있다. 지금 이 상황은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
이러한 당위적 신념은 좌절될 때 절망, 불안, 도피 욕구로 이어진다. 엘리스는 이러한 신념을 비합리적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인간은 삶의 다양한 조건 속에서도 여러 방식으로 의미와 행복을 찾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후 랑베르는 점차 자신의 신념을 수정하며, 공동체에 남아 자원봉사자로 활동하기 시작한다. 이는 그의 신념이 “지금 내가 있는 자리에서도 의미 있는 일을 할 수 있다”는 합리적 신념으로 바뀌었음을 보여준다.
한편, 과거 범죄 전력이 있는 인물 코타르는 다른 사람들과는 정반대의 반응을 보인다. 그는 오히려 도시 봉쇄 상태를 즐긴다. 아무도 자신을 체포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자신이 기대한 대우를 받지 못하자 불안과 분노를 느끼고, 결국 자살을 시도한다. 코타르의 신념은 다음과 같다.
“세상은 내게 공정해야 하고, 내가 원한 만큼 나를 대접해줘야 한다.”
이러한 ‘타인에 대한 비합리적 신념’은 좌절될 때 분노와 복수심으로 이어질 수 있다. 다른 사람이 나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들을 비난하거나 세상 자체를 저주하게 되는 것이다.
페스트는 소설 속에서 단순한 질병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 내면의 불안, 무력감, 이기심, 연대, 용기, 책임감을 드러내는 일종의 거울이다. 인간이 어떤 선택을 하느냐는 결국 그가 가진 내면의 신념 체계에 달려 있다. 엘리스는 우리를 괴롭게 하는 것은 사건 자체가 아니라 그 사건에 대한 우리의 해석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해석은 언제든 바뀔 수 있다. 불안, 절망, 분노, 도피 같은 감정과 행동은 비합리적 신념을 논박함으로써 변화할 수 있다. 이는 단순한 낙관주의가 아니다. 오히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되, 그 안에서 합리적으로 사고하고 새로운 감정을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코로나19는 지나갔지만, 그 시기를 통해 우리는 인간 심리의 복잡성과 유연함을 다시금 목격했다. 누군가는 극단적 음모론에 빠지고, 누군가는 방역 지침을 무시하거나 과도하게 불안해했으며, 또 다른 이는 연대와 협력을 통해 공동체를 지켰다. 같은 사건이었지만, 모두가 같은 방식으로 반응하지는 않았다.
카뮈의 『페스트』는 우리에게 묻는다. 어떤 신념을 가지고 이 현실을 받아들이고 있는가?
그리고 심리학은 그 질문에 하나의 해답을 제시한다.
비합리적인 신념을 인식하고 그것을 논박하는 데서부터, 새로운 삶의 태도는 시작될 수 있다.
출처
강영준. (2021). 친애하는 내 마음에게. 두리반.
알베르 카뮈. (2011). 페스트. 민음사.
앨버트 엘리스. (2024). 위대한 심리학자 앨버트 엘리스의 인생수업. 초록북스.
앨버트 엘리스. (2007). 합리적 정서행동치료. 학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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