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민
[한국심리학신문=이경민 ]

▲ 사진 출처: X
‘요근래 봤던 스캠문자들 중 가장 아련했던 메세지’라며 인터넷에 떠돌았던 문구가 있다. 바로 이 기사의 제목이기도 한 ‘서울은 여전히 서울이고 나는 여전히 나야 너는 여전히 너야?’라는 문구이다. 어딘가 감성적인 플레이리스트의 제목과도 같은 이 문구를 보며, 필자는 집에 같이 살고 있는 노견 한 마리를 떠올리게 됐다. 필자가 초등학교 6학년이던 시절부터 같이 지내기 시작해, 어느덧 10살이 넘은 우리 집 웰시코기. 아직 치매가 왔다거나, 신체 어디가 크게 불편하지는 않지만, 이 아이도 많이 나이 들었음을 실감할 때가 종종 있다.
나는 언제까지 ‘나’일 수 있을까?
노화의 과정에서 당연하게도 신체 능력, 감각 능력 등 모든 것이 퇴화하겠지만 그중에서도 제일 두려운 게 있다면 어떤 것인가? 필자는 본인의 ‘기억 능력’이 감퇴하는 것이 가장 두렵다. 치매에 관해서는 슬픈 이야기들이 많다. 자기 자식, 자신의 배우자를 내가 몰라보게 된다면, 나 스스로가 그런 나를 용납할 수 있을까? 애초에 지금의 나를 이루는 것이 나의 과거 경험, 나의 기억들이라면, 그런 기억을 잃어버린 나는 과연 ‘나’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리는 과거에 대한 기억을 토대로 현재를 구성하고 미래를 계획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기억’이란, 우리의 ‘자아’를 구성하는 데 있어서 필수적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한편, 이와는 반대로, 기억을 잃는다는 것이 ‘나’라는 존재의 상실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것을 시사하는 이야기도 있다.
10년 이상 치매 환자를 관찰해 온 과학자 피아 콘토스(Pia Contos)의 일화는 이런 질문에 깊은 울림을 준다. 그녀가 돌보던 알츠하이머 환자 중에는 인지 기능이 손상되어 말을 할 수도, 스스로 식사를 할 수도 없는 할머니가 있었다. 늘 휠체어에 앉아 있어야 했고, 간호사의 도움 없이는 생활할 수 없는 상태였다. 그러나, 식사 시간이 되어 간호사가 옷에 음식이 묻지 않도록 턱받이를 채워주면, 할머니는 늘 손에 힘을 주어 자신이 걸고 있던 진주 목걸이를 턱받이 위로 꺼내 올렸다. 목걸이가 잘 보이도록 매만진 후에야 그녀는 비로소 식사를 시작했다.
피아 콘토스는 이 순간을 "치매의 심연에서 그녀는 아주 강하게 존재를 드러낸 것"이라고 표현했다. 인지 기능이 손상되었지만,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자신을 표현하려는 본능만은 그대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기억이 사라진 후에도 어떤 본질적인 '나'는 여전히 존재하며, 때로는 작은 행동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강하게 드러내기도 한다. 이 이야기는 기억만이 우리의 존재를 정의하는 유일한 요소가 아니라는 점을 시사한다.
기억을 잃으면 불행해지는 것일까?
이러한 물음에 대해 심리학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사례 중 하나인 헨리 구스타프 몰레이슨(Henry Gustav Molaison)의 이야기는 중요한 시사점을 던진다. 어릴 적부터 간질 발작을 앓던 그는 1953년, 증상 완화를 위해 뇌의 일부인 해마를 제거하는 수술을 받았다. 수술을 통해 간질 발작을 멈추는 데 성공했지만, 예상치 못한 부작용이 나타났다. 헨리 몰레이슨은 수십 초 정도에 해당하는 단기 기억은 생성할 수 있었지만, 장기 기억을 새롭게 생성할 수 없었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모든 것이 새로운 하루였다. 수술 이후 몇 년간 거의 매일 만나던 연구자도 항상 처음 보는 사람처럼 느꼈고, 어제 겪었던 일들을 기억하지 못했다. 그의 삶은 영원히 현재에 갇혀버린 듯했다. 그렇다면 그는 불행했을까? 과거 심리학 초기 단계에서는 기억을 잃은 사람을 인간으로서의 가치와 행복을 상실한 존재로 보는 시각이 강했다. 그러나 헨리 몰레이슨이 사망할 즈음에는 ‘과연 정말 그런가’라는 방향으로 시선이 바뀌는 경향이 있었다. 그는 연구자에게 친절하고도 호의적인 사람이었다고 전해진다. 헨리 몰레이슨을 연구한 많은 학자가 있었는데, 리포트를 살펴보면 헨리 몰레이슨에 대해 서술하는 어조와 문체가 그저 실험 대상을 바라보는 듯한 어조에서 조금씩 따뜻하게 바뀌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의 삶은 기억이라는 것이 꼭 행복의 전제 조건은 아닐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여전할 수 없더라도
노견이 된 강아지와 산책을 하다가 가끔 있는 마음 아픈 일은, 예전이라면 전혀 걸려 넘어지지 않을 만한 곳에서 정말 예상을 못 했었다는 듯이 고꾸라지는 것을 볼 때이다. 신체 능력의 감소도 영향이 있겠지만, 강아지가 보는 시야 자체가 좁아진 것이다.
우리가 세상과 상호작용을 함에 있어서 일단 자극을 받아들이는 ‘감각’이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노화가 진행됨에 따라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모두 노화되지 않는 감각이 없다. 75세 노인은 시야가 젊었을 때의 2/3로 줄어들고, 90세가 되면 1/2로 줄어든다. 65~75세 사이 연령대에서는 대략 30%, 75세 이상에서는 대략 50%가 청력이 눈에 띄게 떨어진다.
평소에 맛있게 먹었던 할머니의 음식이 어느 날부터 점점 짜지기 시작한다. 실제로 젊은 사람이 느끼는 만큼의 짠맛을 노인이 똑같이 느끼기 위해서는 다섯 배로 강한 짠맛이 필요하다. 약을 장기간 복용한 노인의 경우는 짠맛을 인식하는 능력이 열 배나 감소하기도 한다.
그렇다. 기억 면에서도, 감각 면에서도, 이 기사에서 자세히 다루지는 못했지만 신체 운동 능력 면에서도 우리는 결코 여전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단지 ‘원래의 내가 상실되는 것’으로만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그 과정을 너무 슬프게 바라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여전히 나를 나답게 만드는 본질적인 무언가가 있다고는 하더라도, 그것이 ‘턱받이 위의 진주 목걸이’로 드러난 적이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는 위로가 되지 않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작은 목걸이처럼 우리 자신을, 그리고 서로를 온전히 지켜내려 애쓰는 존재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의 삶은 결코 예전과 같을 수 없지만, 상실의 길목에서 서로의 존재를 긍정하는 것, 바로 그것이 우리가 마침내 '우리'로 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아닐까.
*참고문헌
1) 아닐 아난타스와미(2023), 나를 잃어버린 사람들, 더 퀘스트
2) 최현석(2009), 인간의 모든 감각, 서해문집
3) Oliver Sacks(2016),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알마 출판사
4) 이즐라(2023), 지적 호기심을 위한 뇌과학 만화, 큐리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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