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척, 강인함의 다른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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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척, 강인함의 다른 이름 - 논문 <여성의 보이지 않는 강인함 ‘억척’에 대한 심리학적 탐구>를 참고하여
  • 기사등록 2025-10-02 09:5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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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심리학신문=이제희 ]


웃음거리로 소비된 단어 : 억척

 

2000년대와 201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드라마와 예능에서 ‘억척스러운 아줌마’는 흔히 볼 수 있는 캐릭터였다. 과장된 억양과 쉴 새 없이 움직이는 손길, 투박하고 촌스러운 생활력은 그녀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장치이다. 주로 집안일과 가족 부양에 몰두하는 모습으로 그려졌지만, 동시에 남편의 외도나 바깥 활동을 정당화하는 변명의 도구로도 소비되기도 했다. 이러한 반복적 묘사는 억척스러움을 조롱과 비하의 언어로 전환하며, 강인함의 본래 의미를 희화화하는 하나의 클리셰로 굳어졌다.

 

드라마가 반영하듯, 일상 속에서도 ‘억척스럽다.’는 표현은 주로 여성의 노력과 근면을 폄하하는 맥락으로 쓰였다. “너 왜 이렇게 억척스럽게 굴어.”라는 말은 누군가 열심히, 치열하게 행동할 때 쓰였지만, 실제로는 그 사람의 노력을 부정하고 부담스럽게 만드는 말이었다. 억척은 웃음거리이자 비난의 코드로 자리 잡아, 사회적 낙인으로 작동하며 여성의 성실함과 강인함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하게 만드는 역할을 해왔다.

 

키워드 '억척스러운 아줌마' 검색 결과, 웹 페이지 네이버


“내 안에 있는 억척스러움이 아름답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좋겠다.”

 

한국방송통신대 하혜숙 교수와 경인교육대 황매향 교수는 최근 한국 여성의 ‘억척스러움’의 가치를 다룬 논문을 발표했다. 두 학자는 한국 여성의 진정한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질문하며, 그 답을 눈에 보이지 않는 강인함, 곧 ‘억척’에서 찾는다.

 

억척스러움이란 어려운 상황에서도 굴하지 않고 버텨내며 목적을 이루려는 태도를 뜻한다. 사전적으로는 고집이나 억지와 같은 부정적 의미도 포함하지만, 사회적·역사적 맥락에서 보면 생존과 책임을 짊어진 강인함으로 새롭게 해석할 수 있다.

 

우리 사회는 여성에게 두 가지 상반된 요구를 한다. 한편으로는 자율적이고 능동적으로 사회적 성취를 추구하라고 독려하면서도, 동시에 결혼과 함께 가정에 머무르며 전통적인 역할을 다하라고 압박한다. 이 이중적 기대 속에서 한국 여성들은 자연스럽게 억척스러운 면모를 후천적으로 키워왔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내적·외적 요소가 조화를 이룰 때 드러난다. 그러나 오늘날 사회는 눈에 보이는 외적 아름다움에 지나치게 몰두하며, 그 과정에서 마음의 힘과 같은 본질적 가치를 잃어가고 있다. 외적인 기준을 좇아 잠시 행복을 얻을 수는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궁극적인 만족에 도달하기는 어렵다.

 

신경과학자 다니엘 레비틴은 세계적인 전문가가 되려면 1만 시간의 꾸준한 연습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목표를 향해 끝까지 나아가게 하는 힘, 그 끈기와 집념이 바로 억척이다. 결국 억척스러움이야말로 자신이 원하는 성취와 행복에 다다르게 하는 내적 자질이자, 우리가 다시 발견해야 할 가장 한국적인 아름다움이다. 모든 아름다움 안에는 강함이 있고, 그 강함 안에는 아름다움이 스며있기 마련이다.

 

억척의 심리학적 해석

 

심리학에서 억척스러움은 단순한 고집이나 억지가 아니라, 인간이 역경을 견디고 성취에 다다르게 하는 심리적 자질로 해석될 수 있다.

 

먼저 회복탄력성(Resilience)은 충격이나 실패, 상실 같은 부정적 경험을 겪더라도 다시 일어나 앞으로 나아가는 힘을 의미한다. 억척은 단순히 상황을 참는 것이 아니라, 어려움을 자기 성장의 계기로 삼고 다시 도전하는 태도라는 점에서 회복탄력성과 연결된다.

 

둘째, 그릿(Grit)은 장기 목표를 향해 끈기와 열정을 끝까지 유지하는 심리적 성향이다. 심리학자 앤젤라 더크워스에 따르면, 그릿은 단순히 열심히 하는 것이 아니라, 실패와 좌절 속에서도 목표를 향한 몰입을 지속하고, 장기적인 성취를 위해 흔들림 없이 나아가는 힘을 뜻한다.

 

억척 역시 순간의 고집이 아니라 삶을 꾸준히 밀어붙이는 힘이라는 점에서 그릿과 닮아 있지만, 서구의 ‘그릿’이 개인의 성공과 성취에 집중한다면 한국의 ‘억척’은 단순히 개인적 끈기를 넘어 사회적 기대 속에서 형성된 집합적 심리 자산으로 확장된다는 점에서 달리한다. 

 

셋째, 대처 전략(Coping strategies) 중 억척은 특히 문제 중심적 대처(Problem-focused coping)과 비슷하다. 어려움이나 스트레스 상황에서 문제를 피하거나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해결하려는 태도 역시 억척의 핵심이다. 문제 중심적 대처는 문제의 원인을 자기 내부의 결함으로만 돌려 자책하지 않고, 해결 가능한 구체적 요인에 주목하여 이를 바꾸려는 태도이다.

 

이러한 모습은 조정래의 한국 근현대사를 배경으로 한 대하소설 『태백산맥』의 ‘순자’에게서 전형적으로 드러난다. 그녀는 가족의 생계가 위태로워도 불평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직접 일을 찾으며, 주변의 도움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해결책을 찾아 나서는 전형적인 억척스러운 엄마 캐릭터다.

 

언어를 바꾸면 시선이 달라진다.

 

그동안 우리는 억척스러움을 종종 경멸이나 비난의 어투로 언급하였다. 그러나 이 억척스러움이야말로 현재의 빛나는 한국을 만든 원동력이었으며, 어려움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목표를 향해 나아간 사람들의 힘이었다.

 

앞으로도 억척은 개인의 성취를 넘어 사회와 공동체를 지탱하며, 한국의 미래를 짊어지고 나갈 또 다른 원천이 될 것이 틀림없다. 우리 시선과 언어가 바뀌는 순간, 억척의 가치와 아름다움이 새롭게 드러난다.


*참고 문헌

1) 하혜숙, 황매향. (2025). 여성의 보이지 않는 강인함 '억척'에 대한 심리학적 탐구. 통합인문학연구. 17권 1호. p137~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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