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야서재

민호는 언덕 아래의 폐허 마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곳은 전쟁 초기에 불타버린 마을이었다.
무너진 지붕 사이로 초목이 자라나 있었고,
오래된 연기 냄새가 아직도 남아 있었다.
그는 조심스레 그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한때 사람들이 살던 흔적, 금이 간 그릇, 부서진 문패, 바람에 날리는 천 조각.
모든 것이 침묵 속에 묻혀 있었다.
그러나 그 중 하나가 그의 발에 걸렸다.
작은 금속 상자였다.
녹슬어 있었지만,
뚜껑에는 익숙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Y.H.’
민호의 심장이 순간 멈췄다.
그는 상자를 두 손으로 감싸 쥐고,
떨리는 손으로 열었다.
안에는 오래된 편지 한 장과,
낡은 리본이 들어 있었다.
편지는 반쯤 탔지만,
한 구석에는 선명한 글씨가 남아 있었다.
“민호야, 이 전쟁이 끝나면… 다시 봄을 맞이하자.”
그 문장을 읽는 순간, 그의 손끝이 떨렸다.
글씨는 분명 윤희의 것이었다.
그는 눈을 감고 숨을 들이마셨다.
따뜻했던 기억이 한순간에 되살아났다.
청년이 그를 찾아 언덕 아래로 내려왔다.
“민호님, 무슨 일이십니까?”
민호는 잠시 침묵하다가 상자를 건넸다.
“그녀의 흔적이야.
윤희가… 여기에 있었어.”
청년은 상자를 조심스레 받으며 말했다.
“살아있을 가능성도 있겠죠.
이 근처엔 피난민들이 많이 흩어졌다고 들었습니다.”
민호의 눈빛에 희미한 빛이 스쳤다.
“그래… 그렇다면, 아직 끝난 게 아니군.”
그날 밤, 민호는 모닥불 곁에서 편지를 바라보았다.
그 종이는 이미 부서질 듯 약했지만,
그의 손길은 부드러웠다.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름을 되찾는다는 건… 결국 마음을 되찾는 일이었구나.”
청년이 옆에 와서 조용히 말했다.
“우린 이제 새로운 길을 찾아야 합니다.
잃어버린 사람들을 되찾고, 남은 이들을 지켜야죠.”
민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손에서 편지가 바람에 흔들렸다.
멀리서 새벽빛이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그 빛은 마치 윤희의 손길처럼 따뜻했다.
작가의 말 :
47화에서는 민호가 잃어버린 아내의 흔적을 발견하며,
전쟁 이전의 ‘인간적인 기억’을 되찾는 장면을 그렸습니다.
이 편지는 단순한 과거의 상징이 아니라,
민호가 앞으로 나아갈 이유가 되는 ‘희망의 씨앗’입니다.
이제 《이름 없는 전쟁》은 ‘상실에서 회복으로’,
그리고 ‘기억에서 희망으로’ 이어지는 두 번째 전환점을 맞이합니다.
다음 화에서는 민호가 윤희의 생존 단서를 따라 또 다른 지역으로 향하게 되는 여정이 시작될 예정입니다.
다른 곳에 퍼가실 때는 아래 고유 링크 주소를 출처로 사용해주세요.
http://www.psytimes.co.kr/news/view.php?idx=114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