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빈
[한국심리학신문=채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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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가 범죄를 저질렀다는 소식을 듣는다고 가정해보자. 이때 "그는 반사회적이였기 때문에 범죄를 저질렀다."는 말은 보통 납득하기 쉽다. 어느정도 사실이기도 하거니와, 사회가 생각하는 범죄자는 보통 반사회적이고 심성이 나쁜 사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대로 "그는 도덕적이었기에 범죄를 저질렀다."는 말은 굉장히 모순적이게 보인다. 도덕적이고 선한 사람이라면 보통 사회에 잘 녹아들어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모범 시민일 것이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어색하게 느껴지는 문장은 인간의 내면에서 벌어지는 심리적 갈등을 설명하는 데 꽤 적절한 표현일지도 모른다. 범죄는 흔히 도덕의 부재, 양심의 결여로 이해되지만, 때로는 그 반대의 이유로 발생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즉, 너무나 발달한 도덕심이 오히려 인간을 죄로 이끄는 역설적인 상황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초자아의 그림자
프로이트는 인간의 마음을 세 가지 층위로 구분했다. 원초아(id)는 인간이 동물로서 가지는 본능적인 욕구와 쾌락을 추구하는 영역이며, 자아(ego)는 현실과 욕구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는 조정자, 이성의 영역이다. 그리고 초자아(superego)는 사회적 규범과 도덕, 윤리의 영역으로, 인간이 죄책감과 양심을 느끼게 하는 근원이다.
얼핏 보면 초자아는 발달하면 좋기만 할 것처럼 보인다. 도덕성과 양심 등은 선한 인간이 가지고 있을 것이라 여겨지는 대표적인 영역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는 초자아가 항상 선하게 작동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초자아가 지나치게 발달하면, 인간은 현실적 기준이 아닌 ‘완벽한 도덕’을 강박적으로 요구받게 된다. 이때 개인은 자신이 아무리 올바르게 행동해도 ‘아직 부족하다’, ‘나는 나쁜 사람이다’라는 자기 비판에 시달린다. 마치 내부에 감시자가 끊임없이 존재하는 것처럼 초자아는 인간을 죄책감과 불안으로 몰아넣는다.
죄의식으로부터의 탈출로서의 범죄
흥미롭게도 이런 심리 상태는 역설적으로 범죄라는 형태의 해방 욕구를 불러올 수 있다. 인간은 고통은 피하고 쾌락은 추구하는 본성을 가졌다. 그러나 지나치게 강한 초자아는 개인을 끊임없이 죄책감 속에 가두며, 그 죄책감에서 벗어날 방법을 찾지 못하는 고통의 굴레로 밀어넣는다. 결국 어떤 이들은 죄를 짓는 행위를 통해 오히려 내면의 긴장을 해소하여 고통으로부터 해방되길 시도한다.
이는 이미 스스로를 유죄로 단정한 사람이 실제로 죄를 지음으로써 그 내면의 모순을 정리하려는 시도라고 볼 수 있다. 이미 죄인이라면 차라리 행동하자는 식이다. 이러한 심리는 현실 속에서도 종종 목격된다.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윤리의식이 강하며 남들에게 모범적이라 평가받는 사람이 갑작스레 범죄를 저지를 때가 그 대표적인 예시이다. 겉으로는 완벽해 보이지만 그 내면에서는 지나친 도덕의 압박이 한계에 다다른 결과일 수 있다.
‘죄’는 때로 자기 구원의 언어가 된다
초자아가 너무 강한 사람은 스스로를 끊임없이 검열한다. 그는 실수를 죄로, 실망을 악으로 받아들이며, 자기비판을 통해만 존재의 가치를 확인하려 한다. 그러나 이런 자기심판이 계속되면, 인간은 스스로를 구원할 통로를 잃게 된다. 그때 범죄는 일종의 심리적 탈출구로서 기능하게 된다.
예를 들어, 청렴과 규율에 강박적으로 집착하던 사람이 갑작스럽게 부패 행위나 폭력적 행동을 보일 때, 그것은 단순한 도덕적 붕괴나 개인적 타락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도덕성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일시적 반란일 수 있다. 그는 사회의 규범을 어기는 동시에 자신을 감시하던 내면의 초자아를 무너뜨림으로써 죄의식의 굴레에서 해방되려는 심리적 시도를 하는 것이다
이러한 해방은 일시적이고 파괴적이지만,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죄책감이 사라지게 된다. 역설적으로, 그가 진정으로 벗어나고 싶었던 것은 법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만들어낸 도덕의 감옥이었을지도 모른다.
초자아의 폭력성
우리는 흔히 도덕과 윤리를 인간의 선한 본성으로만 이해하지만 그것은 내면의 폭력이 될 수도 있다. 초자아는 개인에게 사회적 기준을 주지만 동시에 그 기준으로 자신을 끊임없이 처벌하게 만든다. 그 결과, 인간은 외부의 법보다 더 잔혹한 내면의 재판을 끝없이 받게 된다.
초자아가 “이건 옳지 않아”라고 속삭일 때, 자아는 현실적 타협을 시도하지만 원초아의 본능적 욕망은 억눌린다. 이 억압이 지속되면 욕망은 왜곡된 형태로 폭발하며, 그것이 바로 범죄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때의 범죄는 사회적 반항이 아니라, 심리적 균형을 회복하려는 몸부림이다.
도덕이 만든 죄, 죄가 낳은 구원
이 관점에서 보면, 어떤 범죄는 단순한 악행이 아니라 자기 구원의 실패한 형태로 읽힌다. 초자아의 명령은 인간에게 도덕적 기준을 부여하지만 동시에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 기준을 영원히 만족시킬 수 없다는 절망도 안겨준다. 결국 인간은 도덕적 긴장 속에서 살아가며, 어떤 이들은 그 긴장을 견디지 못하고 행동을 통해 해소하려 한다. 비록 그 행동이 사회적 규범을 어긴다 할지라도 심리적으로는 일종의 정화로서 작용하는 것이다.
때문에 범죄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법과 규범의 틀을 넘어 인간 내면의 윤리적 피로를 읽어야 한다. 세간의 인식과는 달리 선을 너무 강하게 믿는 자는 결국 자신 안의 악을 마주하게 되는 결과를 얻는 경우도 존재하기 떄문이다.
도덕과 죄의식의 조율
도덕은 인간을 지탱하지만 동시에 인간을 옥죄기도 한다. 초자아가 강하게 발달한 사람일수록 자신을 끊임없이 판단하고, 그 판단 속에서 죄책감에 시달린다. 그럴 때 범죄는 단순한 파괴가 아니라, 죄의식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왜곡된 자기 구원의 몸짓이 된다.
결국 인간은 선과 악 사이에서 완벽한 균형을 유지할 수 없는 존재다. 프로이트가 말한 초자아의 역설은 우리에게 이렇게 속삭인다. 모든 죄는 때로 너무 완벽하고자 하는 인간의 마음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선과 악 사이의 중간을 목표로 해야한다. 물론 대부분의 ‘중간만 하자’가 그렇듯, 그것의 실현이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상을 목표로 삼는 것조차 하지 않는다면 과연 인간이 발전할 수 있었을까. 불가능함을 알아도 우리는 균형을 목표로 하는 이상주의자가 되어야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을 실현하는 가장 빠르고 쉬운 길은 가족애, 우정, 사랑, 박애, 관용과 같은 아름다운 마음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참고문헌
1) 李炯得. (1973). 罪意識과 퍼스낼리티의 傾向性. 동서문화, 5, 149-177.
2) 정병길. (2012, 10). 오! 꿈! 치유회복을 위한 진실 왜곡된 죄책감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지혜. 새가정,, 92-95.
3) 정진만 (2011). 법/초자아에서 사랑으로—허먼 멜빌의『빌리 버드』에 나타나는 법, 폭력, 그리고 사랑의 가능성. 영어영문학, 57(5), 787 - 812.
4) 정도언. "'초자아'의 파괴성[정도언의 마음의 지도]". 동아일보. 2022.10.12
https://www.donga.com/news/Opinion/article/all/20221012/115906309/1
5) 김석. "양심의 역설과 건강한 사회". 서울로컬뉴스. 2018.08.07
https://www.sl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20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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