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하은
[한국심리학신문=김하은 ]

영국 요크셔 지방의 황량한 시골 마을, 바람이 끊임없이 불어 나무조차 자라지 못하는 외딴 언덕 위에 ‘폭풍의 언덕(Wuthering Heights)’이라 불리는 저택이 있다. 이곳에는 언쇼 일가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집안의 가장 언쇼는 고아 소년 하나를 데려와 ‘히스클리프’라 이름 짓고, 아들 힌들리와 딸 캐서린과 함께 키운다. 시간이 흘러 언쇼 부부가 세상을 떠나고, 힌들리가 가주의 자리를 물려받으면서 비극의 서막이 열린다. 힌들리의 아내는 출산 중 사망하고, 그는 술과 방탕에 빠져 집안을 망가뜨린다. 한편 캐서린과 히스클리프는 어린 시절부터 서로에게 깊은 애착을 느꼈지만, 신분의 벽 앞에서 결국 이어지지 못했다. 캐서린은 히스클리프를 마음에 품은 채 부유한 이웃 ‘스러시크로스 저택’의 주인 애드거와 결혼하고, 히스클리프는 상처를 안은 채 저택을 떠난다. 세 해 뒤, 그는 부유한 신사의 모습으로 돌아오며 복수의 불길을 품게 된다.
정신분석학자 존 볼비(John Bowlby)와 심리학자 메리 에인스워스(Mary Ainsworth)는 ‘애착(attachment)’이 인간의 사고와 행동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보았다. 이들은 동물행동학적 관점에서 애착을 ‘미성숙한 아이가 생존을 위해 믿을 만한 존재에게 가까이하려는 본능적 욕구’로 정의했다. 어린아이는 익숙한 사람 앞에서는 웃음을 보이고, 그가 떠나면 울거나 떼를 쓰며, 낯선 사람에게는 두려움을 드러낸다. 이러한 본능적 행동에 양육자가 따뜻하게 반응하면 아이는 ‘안정적 애착’을 형성하게 된다. 반면, 애착이 제대로 형성되지 않으면 불안과 공포가 증폭되어 폭력적이거나 불안정한 성향을 보이기도 한다. 흥미로운 점은, 애착은 반드시 부모나 양육자에게만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아이에게 의미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애착의 대상이 될 수 있다.
히스클리프는 태생부터 고아였다. 애착을 형성할 대상이 없었던 그는 처음에는 방어적이고 공격적인 성향을 보였다. 그러나 폭풍의 언덕에서 언쇼 부부의 보살핌을 받고, 또래의 캐서린과 함께 지내면서 비로소 인간적인 유대와 애착을 경험한다. 캐서린 역시 부모의 죽음과 오빠 힌들리의 학대 속에서 자신을 지탱해줄 유일한 존재로 히스클리프를 의지했다. 두 사람의 관계는 단순한 사랑을 넘어, 서로의 생존을 지탱해주는 정서적 안전기지였다. 반면 힌들리는 아버지 언쇼에게 냉대받으며 애착 형성에 실패했다. 아내의 죽음은 그의 마지막 정서적 끈마저 끊어버렸고, 아들에 대한 사랑조차 증오로 바뀌었다. 그의 폭력성은 애착 결핍이 빚은 전형적 결과였다.
히스클리프의 복수는 단순한 증오가 아닌, 애착의 상실에서 비롯된 절망이었다. 그에게 캐서린은 세상의 유일한 안식처이자 존재 이유였다. 그러나 캐서린이 에드거와 결혼하면서 그의 정서적 기반은 무너졌다. 히스클리프는 힌들리를 도박으로 파멸시키고 폭풍의 언덕을 차지했으며, 복수를 위해 에드거의 여동생 이사벨라와 사랑 없는 결혼을 강행했다. 이후 그는 자신의 아들 린튼마저 복수의 도구로 이용하며 파괴적 삶을 이어갔다. 결국 캐서린을 그리워하던 히스클리프는 공허함 속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한다.
결국, '폭풍의 언덕'은 애착에 대한 이야기이다. 히스클리프의 사랑과 증오는 모두 결핍된 애착의 또 다른 얼굴이었다. 그는 끝내 애착의 대상을 잃은 고아로 남았고, 그 상실을 복수로 메우려다 스스로를 파멸시켰다. 다시 말해 “폭풍의 언덕”은 단순한 사랑의 비극이 아니라, 인간이 얼마나 관계에 의존하며 살아가는 존재인지를 보여주는 심리학적 서사다. 폭풍이 휘몰아치는 언덕 위 저택처럼, 애착의 상처는 한 인간의 내면을 끊임없이 흔들고 있었다.
참고문헌
친애하는 내 마음에게 (강영준, 두리)
폭풍의 언덕 (에밀리 브론테, 민음사)
존 볼비의 안전기지 (존 볼비, 학지)
메리 에인스워스의 심리학 애착유형이론 톺아보기 (송현철, 루미너리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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