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희
[한국심리학신문=이제희 ]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지난 10월 29일, 경주 APEC (아시아 태평양 경제협력체)에서 한국과 미국은 대미 투자 협정을 체결했다. 그동안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던 협상 조건들이 경주에서 마침내 타결되면서 일찍이 협상 도장을 찍은 일본과의 비교가 시작되었다.
양국의 내수 시장 규모와 기존 무역의 차이를 감안하더라도, 미국의 관세 전쟁 선포 이후 처음 제시된 대미 투자 조건은 선제적이고 위협적인 일방적 거래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미국에 의존해온 구조를 뒤엎는 선택 역시 자국에 큰 위험을 안고 있는 결정으로, 일본과 한국을 포함하여 새롭게 협정을 체결한 국가 모두에게 비상 신호로 여겨졌다.
저울의 추가 한쪽으로 기울어진 거래 대상국과 피할 수 없는 새로운 협정을 체결 과정 속, 게다가 아군과 적군을 구분 짓지 않고 저돌적으로 다가오는 상대로부터 자국의 이익을 최대한 지킬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었을까?
협상의 주도권을 잃지 않고, 나의 의견을 명확히 제시하기
트럼프는 강력한 협상자이다. 상대를 향해 강력한 압박을 가하고, 자신의 입장을 단호하게 밀어붙이는 방식을 사용한다. 상대방을 압도하는 힘으로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위해 적극적인 행동도 구사하는 리더인 것이다. 협상 테이블에 앉기도 전, 트럼프는 관세 폭탄으로 기선 제압 후 자신의 위치가 우위에 있다는 것을 경험시킨다.
강한 상대를 만나면, 자연스럽게 나도 똑같이 강하게 나오기 쉽지 않다. 협상 테이블이 나에게 불리하게 만들어졌고, 상대는 협상이 결렬되더라도 아쉽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면, 그 순간부터 협상에서 주도권을 잃게 된다. 하지만 바로 이 지점에서 설득의 심리학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상대방의 강한 압박에 굴복하지 않고, 단호한 입장을 고수하며 시간을 끌거나, 나만의 새로운 우위를 점하는 방식을 찾아내는 것이 협상의 핵심이다. 그렇다면 시간이 지날수록 “결렬”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자신의 입장이 강화되는 결과를 얻는다.
일본은 비교적 한국보다 빠른 협상을 타결하였고, 아직 한국은 협상이 끝나지 않아 자동차 관세 25%라는 불리한 조건 속에서 기업들이 부채 부담을 가중시키고 있었다. 시간이 길어질수록 국내 여론에서는 일본처럼 빠르게 협상을 체결하라는 신속론도 제기되었지만, 정부는 불리한 조건에서 협상하는 것보다는 자국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의 투자 조건으로 바꾸려는 입장을 고수했다. 이에 어마어마한 돈을 미국에 투자하느니, 국내 기업에 투자를 통해 높은 관세를 방어하는 것이 더 이득이라는 주장도 힘을 입었다.
감정을 분리하고 논리적으로 대응하기
협상은 이익을 쫓는 과정을 말한다. 협상 과정에서 감정적으로 억울한 상황에 처했을 때, 기존의 논리적이고 전략적인 접근을 유지하는 것은 어렵다. 감정의 동요는 상대가 원하는 ‘흔들림’이기도 하다. 한국에게 미국 조지아주 강제 구금 사태는 감정적으로 억울하고, 외교 적으로도 불리한 상황이었다. 자국민의 안전이 담보되지 않은 시점에서 협상의 방향은 부정적으로 흐를 가능성은 매우 컸다.
그럼에도 한국은 감정을 앞세우지 않았다. 설득의 심리학에서 감정의 억제는 ‘인지적 일관성’을 지키기 위한 핵심 전략으로 꼽힌다. 감정이 개입되면 판단 기준이 흔들리고, 결국 상대가 원하는 구도나 비협조적인 결과로 흘러갈 위험이 크다. 따라서 협상가가 취해야 할 태도는 분노의 표현이 아니라, 논리의 일관성이다. 이미 비합리적인 사건은 일어났고, 교류를 완전히 중단할 수도 없는 상황이라면 상대의 비합리성에 감정적으로 응하기보다는 냉정하게 논리로 대응해야 한다.
이와 관련해 지난 29일 경주 APEC 연설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김정관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을 “아주 훌륭한 분이자 까다로운 협상가”라고 언급하며 “조금 덜 능숙한 사람을 만났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오랜 기간 기업가로 활동해온 트럼프가 상대국 실무자를 공개적으로 칭찬한 발언은 극히 이례적이라는 평가다.
상대를 존중하고, 친절을 베풀기
협상은 자기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싸움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싸움의 과정에서 상대를 존중하고 예의를 지키는 태도는 결코 약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상대를 존중하고 친절을 베푸는 것은 돈이 들지 않는다. 오히려 상대의 방어심리를 낮추고, 대화의 폭을 넓히는 기본적인 전략이다.
설득의 심리학에서는 이를 ‘호감의 법칙(Liking Principle)’이라 부른다. 자신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는 상대에게 더 쉽게 마음을 연다. 특히 국가 간 협상처럼 첨예한 이해관계가 걸린 자리에서는, 존중의 언어를 통해 신뢰를 쌓는 것이 장기적으로 더 큰 힘을 발휘하게 된다.
1차 한미 정상회담에도 한국의 태도는 일관되었다. 김정관 산업통산자원부 장관을 비롯한 협상 대표단은 몇 차례 미국행 비행기에 올라 직접 조율에 나서는 등 적극적인 자세를 보였다. 경주 APEC에서도 여러 선물 공세 등 그 태도는 마찬가지이다. 강한 협상가일수록, 칭찬에 약하다.
한국이 일본보다 미국과의 협상을 더 잘한 건가요?
맞다고 말하는 쪽과, 사실상 비슷하다고 말하는 쪽 모두 그럴싸한 근거를 내세운다. 그러나 협상의 끝이 아니라, 이제야 제대로 된 시작이 열렸다고 볼 수 있다. 자국 우선주의와 보호무역을 강조하며 강한 국가를 내세운 미국과 일본, 실용주의를 기조로 상호 신뢰와 협력을 강조한 한국. 여기에 중국과 북한 등 주변국까지 얽히면서 앞으로 우리는 장기적 외교 전략과 새로운 설득의 심리가 기다리는 무대에 서게 될 전망이다.
*참고문헌
1) 동아일보. (2025). https://n.news.naver.com/article/newspaper/020/0003670804?date=20251030
2) 매일경제. (2025). https://www.mk.co.kr/news/world/11455485
3) 오마이뉴스. (2025). https://www.ohmynews.com/NWS_Web/Series/series_premium_pg.aspx?CNTN_CD=A0003169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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