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없는 전쟁》 57화
기사 메일전송
기사수정


아침 햇살이 해온리의 폐허 위로 스며들었다.

전날의 포화가 남긴 냄새는 여전히 공기를 짓눌렀다.

불에 그을린 잔해들 사이로 바람이 스쳤고,

그 안엔 아직 꺼지지 않은 연기와 울음이 섞여 있었다.

은주는 천천히 언덕을 올랐다.

그녀의 손에는 하얀 붕대와,

민호가 남기고 간 헬멧 하나가 들려 있었다.

피와 흙이 뒤섞인 그 헬멧엔

마치 누군가의 숨결이 아직 남아 있는 듯했다.


“민호 씨…”


그녀는 무너진 벽 앞에 조용히 무릎을 꿇었다.

그곳은 민호가 마지막까지 싸웠던 자리였다.

피가 스며든 흙 위에는

탄피와 부서진 총 파편이 흩어져 있었다.

뒤에서 수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분… 마지막까지 싸우셨습니다.”


은주는 고개를 들었다.

수혁의 얼굴엔 상처가 많았지만, 눈빛은 달라져 있었다.

어린 청년의 눈에서 ‘전쟁을 본 사람’의 빛이 있었다.


“형은 말했어요.

‘누군가를 지키는 게 살아가는 이유다.’”


그는 주먹을 쥐었다.


“이제 그 말을 우리가 이어가야겠죠.”


그날 오후,

마을 사람들은 무너진 교회 옆 공터에 모였다.

민호의 시신은 찾지 못했다.

그는 불길 속으로 사라졌고,

남은 것은 군복 조각 하나뿐이었다.

은주는 조용히 말했다.


“그는 떠난 게 아닙니다.

이 마을에, 우리 마음에 남아 있죠.”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는 흐느꼈고,

누군가는 손을 모아 기도했다.

그 순간, 수혁이 앞으로 나섰다.


“우린 이 마을을 다시 세울 겁니다.

민호 형이, 윤희 누나가 꿈꿨던 세상처럼요.”


그의 말에 사람들은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불에 그을린 표지판 하나가 교회 벽에 걸려 있었다.

거기엔 아직 글씨가 남아 있었다.


‘해온리 임시 의료소’


은주는 표지판을 만지며 속삭였다.


“이제 진짜 의료소를 만들 거예요.

다시는 누구도 버려지지 않게.”


해질 무렵,

수혁은 언덕 위에서 불타버린 하늘을 바라보았다.

바람 속에 재가 흩날렸다.

그는 손에 쥔 헬멧을 가만히 내려놓았다.


“형, 이제 우리가 지킬게요.”


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단단했다.

멀리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잔해 속에서도 생명은 다시 피어나고 있었다.

은주가 아이들에게 붕대를 나누며 웃었고,

그 웃음은 잠시나마 전쟁의 그림자를 지웠다.


밤이 되자, 

별빛이 다시 해온리의 하늘을 덮었다.

그 별빛 아래에서 은주는 속삭였다.


“민호 씨… 윤희 씨… 이제 쉬세요.

당신들이 남긴 길을 우리가 이어갈게요.”


그녀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곳엔 마치 두 개의 별이 나란히 빛나고 있었다.

서로를 향해, 결코 꺼지지 않을 듯이.




작가의 말 :

57화는 《이름 없는 전쟁》의 ‘애도와 재건’의 시작을 그립니다.

민호의 죽음 이후, 해온리는 잿더미 속에서도 다시 일어서려 합니다.

이제 전쟁의 중심은 ‘총’이 아닌 ‘생명’으로 옮겨가며,

이야기는 점점 인간의 회복과 공동체의 재생으로 향합니다.

다음 화(58화)에서는

수혁과 은주가 주축이 되어 ‘해온리 의료소’를 세우는 과정,

그리고 전쟁의 잔재 속에서 새로운 세대를 지켜내려는 노력이 그려질 예정입니다.

0
기사수정

다른 곳에 퍼가실 때는 아래 고유 링크 주소를 출처로 사용해주세요.

http://www.psytimes.co.kr/news/view.php?idx=11504
  • 기사등록 2025-11-12 09:35:57
기자프로필
프로필이미지
나도 한마디
※ 로그인 후 의견을 등록하시면, 자신의 의견을 관리하실 수 있습니다. 0/1000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