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없는 전쟁》 5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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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이 흘렀다.

해온리의 하늘은 여전히 잿빛이었지만,

그 안에서 작은 불빛 하나가 피어올랐다.

무너진 교회 옆,

사람들이 힘을 합쳐 만든 작은 천막 위에

하얀 천이 걸렸다.

그 위엔 붉은 십자가가 그려져 있었다.


“여기가 이제 해온리 임시의료소입니다.”


은주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피로했지만, 단단했다.

수혁은 무거운 나무 상자를 옮기며 물었다.


“민호 형이 남긴 의료물자… 아직 이게 다예요?”

“그래요. 약도, 붕대도 부족하지만

이제 시작이에요. 우리 손으로 다시 세우는 거니까.”


그녀의 눈빛은 희미한 빛을 담고 있었다.

전쟁이 남긴 폐허 속에서도,

그녀는 ‘살릴 수 있다’는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

의료소가 문을 연 첫날,

피난민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화상, 파편상, 탈진

모두 전쟁의 흔적이 몸에 남아 있었다.

은주는 그들의 상처를 닦고 붕대를 감았다.


“아프죠? 하지만 괜찮아요. 이젠 안전해요.”


그녀의 손끝은 따뜻했고,

환자들의 눈빛에는 점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수혁은 천막 밖에서 경계를 섰다.

멀리 보이는 산자락에는 여전히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는 무전기를 들고 낮게 중얼거렸다.


“민호 형, 보고 있죠?

우리가 지키고 있어요, 당신이 만든 세상.”


그날 밤, 의료소 안에는 희미한 등불 하나가 켜져 있었다.

은주는 피로에 지친 얼굴로 책상에 앉아

윤희의 글씨가 남은 문서를 펼쳤다.


“이 의료소는 단순한 치료 공간이 아니라,

사람들이 ‘다시 살아갈 이유’를 찾는 곳이 되어야 한다.”


그녀는 조용히 그 문장을 손끝으로 따라 썼다.


“살아갈 이유…”


눈물이 떨어져 글 위에 번졌다.

그때, 천막 문이 열렸다.

한 아이가 들어와 말했다.


“간호사 누나, 수혁 아저씨가 불빛 보라고 해요!”


은주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하늘에는 구름이 걷히고 있었다.

그리고 멀리 언덕 위,

불타던 교회의 종탑 위에서

희미한 불빛 하나가 깜박이고 있었다.


“저게 뭐지?”


수혁이 미소 지었다.


“형이 남긴 신호 같아요. 아직 여기에 있다고.”


은주는 고개를 들었다.

밤하늘의 불빛은 흔들렸지만 꺼지지 않았다.

그녀의 입술이 떨렸다.


“그래요, 민호 씨…

당신이 지킨 이 땅에서,

이제 우리가 사람들을 살릴게요.”


다음 날, 의료소 앞엔 긴 줄이 섰다.

부상자뿐 아니라, 아이를 안은 어머니, 노인들까지.

그들은 전쟁 이후 처음으로

‘치유’라는 단어를 믿기 시작했다.

수혁은 천막 문을 열며 은주를 바라봤다.


“우리, 진짜 시작했네요.”


은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민호 씨의 전쟁은 끝났지만,

우리의 싸움은 이제부터예요.

사람을 살리는 싸움.”


천막 위로 아침 햇살이 비쳤다.

붉은 십자가가 환하게 빛났다.

그 불빛은 마치

전쟁의 어둠 속에서 살아남은 마지막 희망 같았다.




작가의 말 :

58화는 《이름 없는 전쟁》의 ‘회복의 서막’입니다.

폐허 속에서도 인간의 존엄과 연대가 피어나는 순간을 그리고 있습니다.

민호의 죽음 이후, 은주와 수혁은 ‘의료소’를 세우며

전쟁의 상처를 치유하는 새로운 길을 시작합니다.

다음 화(59화)에서는

의료소를 중심으로 모여든 사람들의 이야기,

전쟁 고아, 부상 군인, 상처 입은 어머니 등

각자의 상흔을 가진 인물들의 심리와 회복 서사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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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5-11-13 10: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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