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영빈
[한국심리학신문=한영빈 ]

지난 25일 새벽, 배우 이순재가 9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1956년 연극 무대에 선 이후 70년 가까운 시간, 그는 단 한 번도 배우라는 정체성을 내려놓지 않았다. 140편이 넘는 드라마, 수많은 영화와 연극을 오가며, 지난해까지도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기다리며'와 KBS 드라마 '개소리'에 출연했다.
90세를 넘긴 나이에도 방대한 대사를 외우고 무대에 섰다는 사실은, 단순히 프로 정신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는 심리학이 말하는 '성공적 노화(successful aging)'의 전형적인 사례다. 그의 삶은 우리에게 묻는다. 사람은 어떻게 나이 들어가야 하는가.
심리학자들은 오래전부터 주목해왔다. 새로운 것을 배우고 도전하는 사람의 뇌는 나이가 들어도 활력을 잃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를 '인지 예비력(cognitive reserve)'이라 부른다. 평생 축적된 정신적 자극이 뇌에 완충제 역할을 해, 노화로 인한 인지 기능 저하를 늦춰준다는 개념이다.
이순재의 대본 암기력은 후배 배우들도 감탄할 정도였다. 80대에 '리어왕' 같은 대작에서 200분 공연의 방대한 대사를 소화하는 모습은, 단순히 기억력이 좋았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끊임없이 새로운 대본을 외우고, 새로운 캐릭터를 연구하는 과정 자체가 그의 뇌를 자극했다. 마치 근육을 쓰면 강해지듯, 뇌도 쓰면 쓸수록 활성화된다.
최근 신경과학 연구들은 이를 뒷받침한다. 새로운 언어를 배우거나 악기를 연주하는 노인들의 뇌에서 신경가소성(neuroplasticity)이 활발히 나타난다. 뇌는 평생 변화하고 성장할 수 있다. 이순재는 매 작품마다 새로운 사람이 되어야 했다. 그 과정이 그를 젊게 만들었다.
심리학자 빅터 프랭클은 "삶의 의미를 찾은 사람은 어떤 고난도 견딜 수 있다"고 했다. 이순재에게 연기는 단순한 직업이 아니라, 삶의 이유 그 자체였다. "연기가 쉽지 않다. 평생을 했는데도 안 되고 모자라 늘 고민하고 연구한다"는 그의 말에서, 우리는 완성이 아닌 과정을 사랑한 한 예술가의 태도를 본다.
노년심리학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개념 중 하나가 '생산적 노화(productive aging)'다. 단순히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을 넘어, 사회에 기여하고 자신의 가치를 실현하며 사는 것을 의미한다. 이순재는 90세가 넘어서도 후학을 양성하고, 무대에 서서 관객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그에게는 매일 아침 일어날 이유가 분명했다.
심리학 연구들은 일관되게 보여준다. 삶의 목적의식이 강한 노인일수록 우울증이 적고, 인지 기능이 잘 유지되며, 심지어 사망률도 낮다고. 목표는 우리를 살아있게 만드는 힘이다.
'거침없이 하이킥'의 이순재를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그가 얼마나 자연스럽게 젊은 배우들과 호흡을 맞췄는지 안다. 70대에 시트콤이라는 낯선 장르에 뛰어들어, 손자뻘 되는 후배들과 함께 웃음을 만들어냈다. 예능 프로그램 '꽃보다 할배'에서 보여준 '직진 순재'의 모습은, 나이가 들어도 새로운 관계에 열려 있던 그의 태도를 상징한다.
노년기의 가장 큰 심리적 위험은 고립이다. 은퇴 후 사회적 접촉이 줄어들면서 많은 노인들이 외로움과 우울감을 경험한다. 하지만 이순재는 달랐다. 그는 현역으로 남으면서 끊임없이 사람들과 만났다. 동료 배우들, 스태프들, 관객들과의 상호작용이 그를 세상과 연결시켰다.
심리학자 에릭 에릭슨은 노년기의 발달 과제를 '자아통합 대 절망'이라 정의했다. 자신의 삶을 의미 있게 받아들이느냐, 후회와 절망에 빠지느냐의 갈림길. 지난해 KBS 연기대상에서 역대 최고령 대상 수상자가 된 이순재는, 자신의 삶을 긍정하고 다음 세대와 연결되며 통합을 이뤄낸 사람이었다.
가장 인상적인 점은, 그가 안전한 선택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극의 중후한 아버지 역할로 충분히 존경받을 수 있었던 배우가, 70대에 시트콤에 도전했다. '야동 순재'라는 캐릭터로 어린 팬들을 만들었다. 80대에는 실험적인 연극 무대에 올랐다.
발달심리학자들은 말한다. 노년기에도 성장은 가능하다고. 단, 조건이 있다. 새로운 경험에 열려 있어야 한다는 것. 심리학 용어로 '개방성(openness)'이라 부르는 이 특성은, 나이가 들수록 낮아지는 경향이 있다. 익숙한 것을 선호하고, 변화를 두려워하게 된다.
하지만 이순재는 달랐다. 그는 90세가 되어서도 새로운 작품, 새로운 역할에 도전했다. 실패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보다, 해보고 싶다는 호기심이 앞섰다. 이런 태도야말로 그를 진정한 의미에서 젊게 만든 요인이었다.
이순재의 별세 소식에 소셜미디어에는 "평소 친했던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처럼 먹먹하다"는 애도 글이 이어졌다. 왜 우리는 한 배우의 죽음에 이토록 아파하는가. 그것은 그가 단순히 연기를 잘한 배우가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몸소 보여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심리학이 밝혀낸 성공적 노화의 조건들 - 평생 학습, 명확한 목표, 사회적 연결, 새로운 도전 - 을 이순재는 하나하나 실천했다. 그의 삶은 하나의 증명이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며, 진짜 젊음은 마음에 있다는 것을.
그가 무대에서 내려온 지금, 우리는 묻게 된다. 나는 어떻게 나이 들어갈 것인가. 언제 멈출 것인가. 무엇을 위해 아침에 일어날 것인가. 이순재는 답을 남겼다.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이 사랑하는 일을 하며, 사람들과 연결되고, 배우고, 도전하라고.
"연기에 완성이 없다. 잘할 순 있어도 완성은 아니다"라는 그의 말처럼, 삶에도 완성은 없다. 중요한 것은 마지막 순간까지 더 나은 자신을 향해 걸어가는 것이다. 예능에서 얻은 별명 '직진 순재'처럼, 그는 자신의 길을 끝까지 걸었다.
이순재가 우리에게 남긴 가장 큰 유산은 영화나 드라마 속 명연기가 아니다. 90세가 넘어서도 빛나는 눈으로 무대에 선 그 모습, 새로운 것을 두려워하지 않던 그 용기, 마지막까지 성장하고자 했던 그 열정이다. 그것이야말로 우리 모두가 배워야 할, 진정한 삶의 기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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