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민
[한국심리학신문=이경민 ]

▲ 사진 출처: 픽사베이
2025년의 마지막 페이지가 덮이려 하고 있다. 남은 날들이 손에 꼽힐 만큼 적어진 이 시점에서, 우리는 자연스레 지난 1년의 시간을 되돌아보게 된다. 누군가에게는 숨 가쁘게 지나간 시간이었을 테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더디게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연말 모임에서 공통적으로 듣게 되는 말은 "벌써 1년이 흘렀다니!"라는 놀라움 섞인 탄식이다. 이처럼 시간이 흐르는 속도에 대한 주관적인 경험은 나이가 들수록 더욱 가속화되는 듯한 기묘한 현상으로 다가온다. 왜 우리에게 시간은 점점 더 빠르게 '도둑맞는' 느낌을 주는 것일까?
시간이 나이를 먹을수록 가속도를 얻는다는 현상은 단순한 기분이 아닌, 대다수 사람이 공감하는 보편적인 경험이다. 이는 직관적으로 느껴지는 사실이며, 심리학적 연구를 통해서도 뒷받침된다. 독일,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뉴질랜드 등 선진국에서 2,000명 이상의 성인을 대상으로 실시된 대규모 조사에서도 연령이 높아질수록 시간의 흐름을 더 빠르게 인지한다는 결과가 도출되었다. 특히 중년층은 자신의 학창 시절이나 청년기에 비해 현재 시간이 훨씬 속도감 있게 지나가고 있다고 답했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 가장 쉽고 직관적인 설명으로 흔히 인용되는 것이 '비율'의 개념이다. 열 살짜리 아이에게 1년은 그들이 살아온 전체 삶의 10분의 1을 차지하는 매우 긴 기간이다. 반면, 쉰 살 성인에게 1년은 전체 삶의 50분의 1에 불과한 찰나의 순간처럼 느껴질 수 있다. 인생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줄어들면서 1년이라는 기간의 '체감 무게' 역시 가벼워지는 것이다. 물론 이처럼 간단한 산술적 계산만으로 인생의 시간 감각 전부를 설명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개인마다 시간을 느끼는 속도에는 큰 편차가 존재하며, 단순히 나이가 많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사람이 젊은 시절보다 시간이 빠르게 흐른다고 느끼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기준으로 시간의 속도를 측정하는 것일까?
우리가 시간에 대해 직관적으로 이해하는바 중 하나는 '낯선 곳이나 새로운 환경에 처했을 때 시간의 흐름이 다르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인지하는 시간의 속도가 '경험하는 시간(현재)'과 '기억하는 시간(회상)'이라는 두 가지 층위에서 상반된 양상을 보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심리학자 로버트 오른슈타인(Robert Ornstein)은 경험하는 시간과 기억하는 시간 사이의 관계를 마치 시소가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처럼 상상했다. 현재의 시간이 흥미롭고 재미있어서 빠르게 지나가는 것 같다면, 우리의 기억은 그에 대한 보상으로 풍부하게 남아 삶을 길게 느끼게 된다. 반대로 현재가 지루하고 늘어지는 것 같다면, 기억 속에서는 텅 빈 채 짧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역설을 이해하기 위해 두 가지 상반된 상황을 가정해 보자.
첫 번째는 지루함 속에서 시간이 멈춘 듯 느껴지는 경우이다. 의무적으로 들어야 하는 길고 지루한 세미나를 생각해 보자. 시계를 보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30분은 3시간처럼 길게 느껴진다. 지루함으로 인해 현재의 시간은 마치 거북이 걸음처럼 느리게 흐른다. 그러나 한 달 뒤 그날을 회상해 보면, 특별히 기억할 만한 사건 없이 '그냥 지루했던 교육' 하나로만 남아있다. 몇 시간을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그 경험은 기억 속에서 아주 짧고 희미하게 축약되어 버린다.
두 번째는 새로운 경험 속에서 시간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경우이다. 평생 가보지 못한 완전히 낯선 해외 도시로 떠난 첫날을 상상해 보라. 새로운 건축물, 낯선 언어, 독특한 음식 냄새 등 모든 것이 감각을 자극한다. 우리는 매 순간 새로운 정보를 처리하느라 정신이 없어 시간이 눈 깜짝할 새에 지나갔다고 느낀다. 하지만 숙소에 돌아와 그 하루를 되짚어보면, 아침의 현지 시장부터 저녁의 화려한 야경까지, 새로운 기억의 조각들이 넘쳐난다. 현재는 빨리 흘렀지만, 회상 속에서는 그 하루가 굉장히 길고 충실한 시간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결국, 내면의 시간은 우리가 그 시간을 어떻게 채웠는지에 따라 흐름의 속도가 달라지는 역설을 품고 있는 셈이다.
나이가 시간의 흐름에 미치는 영향을 이해하는 핵심은 '인간의 발달 과정'에 있다. 어린 시절과 청소년기, 그리고 청년기는 심리학적으로 새로운 경험을 끊임없이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폭발적인 발달을 이루는 시기이다. 동생의 탄생, 생애 첫 등교, 부모님 없이 떠나는 여행, 첫 키스, 첫 직장 등 이 시기의 3년은 수많은 '처음'이라는 경험이 압축된 보물 상자와 같다. 불과 몇 년 사이에 아이는 성인의 문턱에 가까워지고, 청년은 학업을 마치고 독립을 경험하며 새로운 직업과 연애, 결혼 등을 통해 또다시 삶을 확장해 나간다. 이 모든 것이 풍부한 기억의 밑거름이 된다.
그러나 청년기 이후의 삶은 점차 예측 가능해진다. 직업이나 거주지가 안정되고 인간관계의 폭이 좁아지면서 새로운 경험의 유입이 현저히 줄어든다. 성인기의 3년은 대개 출근, 업무, 퇴근, 수면으로 이어지는 똑같은 일상이 반복되는 경우가 많다. 이처럼 매일 반복되는 일과는 우리의 기억에 뚜렷한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지난 시간을 돌아보았을 때 기억에 남을 만한 사건이 적으니, 성인들은 자신이 살아온 시간이 매우 짧고 빠르게 지나갔다고 느끼게 된다.
결국 주관적으로 느끼는 시간의 속도는 나이 자체가 아닌, '기억에 남은 변화의 양'에 달려있다고 볼 수 있다. 한정된 기간 동안 얼마나 많은 다채로운 기억을 저장했는가가 삶의 길이를 결정짓는 것이다. 이때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감정이다. 감정과 강하게 연결된 경험일수록 우리의 뇌는 이를 길고 자세하게 인코딩한다. 즉, 경험의 총량에 감정적 다채로움까지 더해질 때 비로소 그 삶은 풍요로워지고, 결과적으로 주관적으로 느끼는 시간의 속도는 느려지게 된다.
이는 우리가 능동적으로 시간 경험을 변화시킬 수 있는 실질적인 행동 지침을 제시한다. 삶의 시간이 너무 빨리 흘러간다고 느낀다면, 일상에 변화를 주어 감정과 결합된 새로운 기억을 의도적으로 만들어내야 한다. 늘 가던 길이 아닌 새로운 장소를 찾아 나서고, 해보지 않았던 취미에 도전하는 작은 노력들이 모여 우리의 삶을 기억 속에서 더 길고 풍요로운 것으로 만들 수 있다.
참고문헌)
1) 마르크 비트만, <시간 제어>, 도서출판 일므디, 2022
2) 슈테판 클라인, <안녕하세요, 시간입니다>, 뜨인돌,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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