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연우
[한국심리학신문=신연우 ]

가끔 이런 순간이 있다. 즐거운 일에도 별로 기쁘지 않고, 슬픈 일이 있어도 눈물이 나오지 않고, 그냥 모든 감정의 볼륨이 0으로 줄어든 것 같은 상태. 사람들은 흔히 “감정이 메말랐다”고 표현하지만, 심리학에서는 이것을 감정 둔마(emotional numbing)라고 부른다. 이건 흔한 스트레스 반응 중 하나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내가 이상해진 걸까?”라며 혼란스러워한다.
감정 둔마는 ‘망가짐’이 아니라 뇌의 방어기제이다
우리가 너무 많은 스트레스, 압박, 상처를 받을 때 뇌는 감정 시스템을 과부하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볼륨을 줄여버리는 전략을 사용한다. 쉽게 말해, 너무 아프니까 뇌가 “느끼지 말자”를 선택하는 것. 이 과정은 나약함이 아니라 오히려 생존을 위한 자동 방어 기능이다. 그래서 감정 둔마는 우울·불안과 함께 나타나기도 하고, 기억 속에서는 “그때 나는 그냥 아무 생각도 없었다”는 식으로 기록된다.
감정이 아닌 ‘자기 인식’이 둔해지는 상태
감정 둔마가 무서운 이유는 기쁨·슬픔뿐 아니라 스스로를 인식하는 감각까지 흐려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내가 뭘 좋아했는지도 모르겠다.”
“딱히 하고 싶은 게 없다.”
“그냥 하루하루 지나가는 느낌.”
“사람 만나는 것도 귀찮고, 안 만나도 허전하지 않다.”
이런 감각은 실제로 자주 보고되는 심리적 신호이며, 무엇보다 동기(동력) 자체가 꺼진 듯한 느낌을 만든다. 이런 감각은 실제로 임상 장면에서도 자주 보고되는 신호다. 문제는 이 상태가 오래 지속될수록, 삶의 방향성과 동기 자체가 꺼진 것처럼 느껴진다는 점이다. 아무것도 크게 싫지 않지만, 동시에 아무것도 끌리지 않는 상태. 그래서 감정 둔마는 때로는 우울보다 더 공허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감정 둔마가 요즘 더 흔해진 이유
특히 10대–20대에게 감정 둔마가 흔해진 배경에는 여러 현대적 요인이 작용한다.
1. 정보 과부하
SNS·학교·진로·관계…감정이 처리할 시간이 없을 정도로 자극이 많다.
2. 지속적 피로
경쟁이 심한 특히 우리나라 현대 사회는 자꾸 바쁘고, 해야 할 일이 끝이 없다. 이로써 스트레스가 계속될 때 감정 시스템은 가장 먼저 꺼진다.
3. 비교의 압박
항상 “누군가는 더 잘하고 있다”는 메시지가 우리를 마비시키는 부정적 자기평가를 만든다.
이 모든 요소가 축적되면 뇌는 자연스럽게 “에너지 절약 모드”로 들어가며 감정 둔마가 나타난다.
문제는 감정 둔마가 주변 사람들에게 오해를 사기 쉽다는 점이다. 무표정해 보이거나, 무심해 보이거나, 이전보다 차가워졌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이는 타인에 대한 무관심이 아니라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감정을 잠시 접어둔 상태에 가깝다. 본인조차도 “내가 왜 이러지?”라고 자책하는 순간,
감정 둔마는 더 깊어질 수 있다.
자신을 탓하지 말자
많은 사람들이 감정 둔마를 “성격이 변한 것 같다”거나 “정이 떨어졌다”는 식으로 오해하지만, 심리학적으로 감정 둔마는 회복의 초반 단계로도 자주 나타난다. 마음이 무너지는 걸 막기 위해 잠시 감정을 꺼놓는 것. 이건 고장 신호가 아니라 버티기 위한 휴식 신호일 때가 많다.감정이 멀어진 건 우리의 잘못이 아니다. 오히려 그 시간을 지나면서 우리는 조금 더 견고하게, 조금 더 부드럽게 다시 자기 자신에게 돌아오는 중일지도 모른다.
참고문헌
American Psychiatric Association. (2013).
Diagnostic and statistical manual of mental disorders (5th ed.).
Litz, B. T., & Gray, M. J. (2002).
Emotional numbing in posttraumatic stress disorder: Current and future research.
Behavior Modification, 26(6), 775–799.
Williams, L. M., Kemp, A. H., Felmingham, K., Barton, M., Olivieri, G., Peduto, A., & Bryant, R. A. (2006).
Trauma modulates amygdala and medial prefrontal responses to consciously attended fe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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