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민
[한국심리학신문=이경민]

▲네이버 웹툰 <닥터 프로스트>
웹툰 <닥터 프로스트>를 본 독자라면 한 번쯤 이런 생각을 해봤을 것이다. 내담자의 미세한 손동작이나 눈빛 하나로 마음의 지도를 그려내는 주인공의 모습이 흡사 ‘탐정’ 같다는 생각 말이다. 처음 심리학을 접했을 땐 그게 그저 만화적 허구라 생각했지만, 공부를 거듭할수록 이 분야에 탐정의 논리 구조와 닮아있는 영역이 있다는 걸 깨닫게 된다.
하나의 예시로, 정신질환 진단 및 통계 매뉴얼(DSM-5)에서 강박장애를 정의하는 문장을 살펴보자.
A. 강박장애는 강박적 사고 또는 강박적 행동을 특징으로 함.
보통 사람들은 '강박'이라는 단어 자체에 주목하겠지만, 내 강의 노트에는 ‘또는’이라는 단어 아래 굵은 밑줄과 함께 이렇게 적혀 있다. "둘 중 하나만 충족되어도 진단 가능."
공부를 하며 깨달은 점은 진단 기준에 ‘그냥’ 쓰인 단어는 단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다. 진단 기준을 서술하는 언어들은 이토록 치밀하고 건조하다. 하지만 그 건조함이야말로 오진을 막기 위한 탐정의 돋보기와 같다. 일상 언어에서는 '대충 비슷한 증상'으로 뭉뚱그려지는 것들이, 임상 장면에서는 단어 하나, 접속사 하나에 의해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분류되기 때문이다.
일상 속에서 인지 기능이 저하된 노인에게 무언가를 말해줬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엉뚱한 이야기를 한다면, 우리는 흔히 "기억력이 예전만 못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임상 현장에서 만난 사례들은 훨씬 더 입체적이다. 교수님께서 들려주신 요양병원의 할머니 사례가 대표적이다.
주변에서는 기억력 감퇴를 의심하며 검사를 의뢰했지만, 정밀 검사 결과는 예상 밖이었다. "사과, 비행기, 악어"를 기억하라는 과제에 할머니는 엉뚱한 단어들을 내뱉으셨다. 그런데 완전히 엉뚱한 단어들은 아니고, 예를 들면 ‘빨강, 하늘, 송곳니’ 이런 식으로 원래의 단어로부터 연상 가능한 단어들을 말씀하셨다.
그런데 놀라운 점은 30분 뒤 재측정 때였다. 할머니는 아까 본인이 말했던 그 '오답'들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이 반복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를 ‘기억력’의 문제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이는 정보의 저장(기억) 자체의 결함이라기보다, 떠오르는 연상 작용을 스스로 통제하지 못하는 문제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진단’이라는 것은 이러한 상황을 면밀하게 분석하고 분류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할 것이다. 정확한 진단이 선행되어야만 그에 걸맞은 정교한 치료적 개입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정교한 기준을 세울수록, 역설적으로 그 기준에 포착되지 못하는 ‘진단의 그늘’ 또한 짙어진다. 임상적 기준이 엄격해질수록 진단명이라는 '박스' 안에 딱 들어맞지 않는 사례들이 발생한다. 그리고 이러한 애매한 ‘경계’ 영역에 머무는 이들은 제도적 지원에서 소외되기 쉽다.

▲드라마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2023) 스틸컷.
“그때도 엄마가 얘기했잖아, 그래야 점수 낮게 나온다고.”
“다른 때는 시험 볼 때 몰라도 다 풀라 그러더니 지금은 왜 그러는 건데.”
드라마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 속 ‘병희’의 사례는 이 비극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병희의 어머니는 딸이 '지적장애' 판정을 받아 국가의 보호를 받을 수 있도록, 지능 검사에서 일부러 낮은 점수를 받으라고 신신당부한다. 하지만 정직하고 순수한 병희는 시험에 최선을 다해 응시하고, 결국 간발의 차이로 장애 판정을 받지 못한다.
이른바 ‘느린 학습자’라 불리는 경계선 지능인은 지능 지수(IQ)가 71~84 사이인 이들을 일컫는다. 정규 분포상 전체 인구의 약 13.5%라는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지만, 현행법상 IQ 70 이하인 지적장애인에게만 집중된 복지 혜택에서 소외되어 있다. 이들을 양육하는 부모들은 돌봄의 무게를 온전히 홀로 짊어지며 심리적, 경제적 고통을 겪는다. 특히 성인이 된 느린 학습자들은 사회적 적응에 더 큰 한계를 느끼며 고립되기 쉽다.
탐정이 사건의 진상을 밝혀 억울한 사람이 없게 하듯, 심리학의 정교한 진단 시스템 역시 단순히 분류하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된다. 진단명이라는 박스 바깥에서 서성이는 이들을 위해, 우리 사회가 생애주기별로 세밀한 관심과 제도적 안전망을 구축해야 할 시점이다.
<참고 문헌>
1) "학교는 빠르고, 지원은 없다"... 교육 사각지대 '느린학습자' , <오마이뉴스>(2025.12.21.)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3191956&CMPT_CD=P0010&utm_source=naver&utm_medium=newsearch&utm_campaign=naver_news
2) 이우경, , 학지사,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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