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야서재

정년 퇴직일이라는 말은 생각보다 가벼웠다.
종이에 적혀 있을 때만 그랬다.
박정호는 출근길에 늘 타던 지하철 칸에 섰다.
같은 시간, 같은 자리였다.
어제와 다른 건 하나뿐이었다.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사실.
손잡이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습관처럼 넥타이를 고쳐 매다 멈췄다.
굳이 단정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스쳤다.
하지만 그대로 두었다.
정돈된 모습으로 끝내고 싶었다.
회사 로비에 들어서자 익숙한 냄새가 났다.
커피, 종이, 에어컨 바람.
이 냄새와 함께 살아온 시간이 삼십 년이 넘었다.
“부장님, 오늘… 그날이시죠.”
후배 직원이 말을 건넸다.
어색한 미소였다.
박정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오늘까지야.”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마치 남의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오늘까지.
그 다음은?
책
상 위에는 이미 상자가 놓여 있었다.
인사팀에서 준비해 준 것 같았다.
정리된 파일들, 오래된 명함첩,
누군가 선물로 준 만년필,
그리고 아무도 읽지 않을 회의 자료들.
물건들은 많지 않았다.
자신의 인생도 그만큼 가벼워진 것 같았다.
점심시간, 작은 송별 자리가 열렸다.
케이크 위에 촛불 대신 “수고하셨습니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부장님 덕분에 많이 배웠습니다.”
“이제 편히 쉬셔야죠.”
“그래도 부장님 같은 분은 계속 일하셔야죠.”
말들은 따뜻했지만,
그 속에 박정호는 이미 없었다.
그들은 ‘부장님’을 보내고 있었지,
‘박정호’를 붙잡고 있지는 않았다.
박수 소리가 울렸다.
그는 웃었다.
잘 웃었다.
삼십 년 동안 그렇게 해왔으니까.
퇴근 시간이 되자 모두가 말했다.
“마지막으로 한 말씀 하시죠.”
박정호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아니, 할 말이 없었다.
“다들… 고생 많았습니다.”
그 말뿐이었다.
그리고 그 말로 충분했다.
회사 문을 나서는 순간,
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낯설게 차가웠다.
시계를 보았다.
오후 여섯 시 십 분.
평소라면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향했을 시간.
그는 잠시 멈춰 섰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
집은 늘 가던 곳이었지만,
오늘은 목적지가 아니었다.
결국 발은 집을 향했다.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집 문을 열자
김미경이 주방에서 고개를 들었다.
“왔어요?”
늘 듣던 말.
늘 같은 톤.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오늘… 마지막이었잖아요.”
그녀의 말에 박정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저녁은 조용했다.
숟가락 소리만 오갔다.
티브이에서는 뉴스가 흘렀다.
누군가의 퇴임 소식이 나왔다.
박정호는 화면을 보지 않았다.
밥을 다 먹고 나서도
둘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이제 뭐 할 거예요?”
김미경이 물었다.
가볍게 던진 질문 같았지만,
그 안에는 불안이 섞여 있었다.
“글쎄.”
그는 그렇게 대답했다.
그게 솔직한 답이었다.
방으로 들어온 박정호는
옷장에서 정장을 꺼내 접었다.
내일은 입을 일이 없을 옷.
거울 앞에 서자
자신의 얼굴이 낯설었다.
회사에서의 자신은 분명했는데,
지금의 자신은 설명할 수 없었다.
침대에 누웠지만
쉽게 잠들 수 없었다.
눈을 감으면
출근길이 떠올랐다.
회의실, 보고서, 전화벨,
그리고 사람들.
눈을 뜨면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문득 생각했다.
내일 아침,
나는 왜 일어나야 할까.
퇴근은 끝이 아니라고들 했다.
새로운 시작이라고도 했다.
하지만 박정호는 알았다.
오늘이 끝이라면,
내일은 아직 이름조차 없다는 걸.
시계 초침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퇴근 이후의 시간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작가의 말
은퇴는 축하로 시작되지만,
그 이후의 시간에 대해서는 잘 이야기되지 않습니다.
이 작품은 그 말 없는 시간에 귀를 기울이고 싶었습니다.
누군가의 아버지이기 전에,
한 사람의 인생으로 남는 이야기를 써 내려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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