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야서재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박정호는 한동안 그대로 누워 있었다.
알람 소리는 울리지 않았다.
울릴 이유가 없었다.
시계를 보니 일곱 시 이십 분.
평소 같으면 이미 씻고 나갈 준비를 하고 있을 시간이었다.
몸은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갈 곳은 없었다.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이불을 개는 손길이 어색했다.
늘 아내보다 먼저 집을 나섰기에
아침의 집은 이렇게 조용한 줄 몰랐다.
거실로 나가자 김미경이 부엌에 서 있었다.
프라이팬 위에서 달걀이 익고 있었다.
“일찍 일어났네요.”
그녀가 말했다.
위로도, 불만도 아닌
애매한 중간 어딘가의 말투였다.
“습관이야.”
박정호는 그렇게 답했다.
습관.
그 단어가 마음에 오래 남았다.
식탁에 마주 앉았지만
둘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어제와 같은 침묵,
하지만 오늘은 이유가 달랐다.
“오늘… 뭐 할 거예요?”
김미경이 다시 물었다.
이번에는 어제보다 조심스러웠다.
박정호는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어제는 ‘마지막’이었고,
오늘은 그냥 ‘오늘’이었다.
“일단… 나가볼까 해.”
“어디?”
“글쎄.”
그는 웃으려다 말았다.
웃을 이유도, 방향도 없었다.
외출 준비를 하며
박정호는 무심코 서랍을 열었다.
그 안에는 명함지갑이 있었다.
가죽이 닳아 있었다.
명함을 꺼내 보았다.
박정호.
○○전자 생산관리팀 부장.
손끝으로 활자를 문질렀다.
이름보다 직함이 먼저 보였다.
늘 그래 왔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명함 한 장을 빼냈다.
그리고 지갑을 다시 닫았다.
오늘은 필요 없을 것 같았다.
집을 나서며 엘리베이터 거울에 비친 자신을 보았다.
정장은 아니었지만,
어딘가 지나치게 단정했다.
“부장님처럼 보이지 않게 입자.”
혼잣말이 나왔다.
그러고 나서
‘부장님’이라는 말이 더 이상 자신을 가리키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떠올렸다.
동네 카페에 들어갔다.
평소에는 출근길에 스쳐 지나가기만 했던 곳이었다.
“주문 도와드릴게요.”
젊은 직원이 웃으며 말했다.
“아메리카노… 하나요.”
“사이즈는요?”
박정호는 잠시 멈췄다.
회사 근처에서는 늘 같은 메뉴, 같은 사이즈였다.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큰 걸로 주세요.”
그 말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선택해야 한다는 사실이.
창가 자리에 앉아 커피를 마셨다.
사람들이 지나갔다.
대부분 빠른 걸음이었다.
출근하는 사람들,
어딘가로 향하는 사람들.
그는 문득 깨달았다.
자신은 더 이상
그 흐름 안에 있지 않았다.
전화가 울렸다.
후배였다.
“부장님, 아니… 선배님.”
상대가 급히 말을 고쳤다.
박정호는 그게 더 아팠다.
“집에 잘 들어가셨어요?”
“응.”
“다음에 한 번 뵙죠.”
다음.
그 단어는 막연했다.
회사에서의 ‘다음’은 늘 일정이 있었지만,
지금의 다음은 약속이 아니었다.
전화를 끊고 나니
손에 쥔 것이 없다는 느낌이 들었다.
직함도, 일정도,
불러주는 호칭도.
그는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맛이 잘 느껴지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엘리베이터에서 이웃을 만났다.
“아, 오늘 쉬세요?”
가벼운 질문이었다.
“아니요… 이제…”
그는 말을 끝내지 못했다.
설명해야 할 것 같았지만
설명하고 싶지는 않았다.
“아, 그러시구나.”
이웃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이상 묻지 않았다.
그게 오히려 다행이었다.
집에 들어오자
김미경이 거실에서 TV를 보고 있었다.
“카페 다녀왔어요.”
그녀가 말했다.
“응.”
그는 소파에 앉았다.
낮인데도 피곤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명함지갑이 주머니에서 느껴졌다.
그는 꺼내지 않았다.
명함이 사라진 자리는
생각보다 컸다.
그 자리에
아직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박정호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해는 여전히 같은 방향으로 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하루는
아직 시작조차 하지 못한 상태였다.
작가의 말 :
직함은 단순한 이름이 아니라
한 사람의 정체성을 대신해 주기도 합니다.
그것이 사라진 자리에
우리는 무엇을 채워야 할까요.
2화는 ‘선택해야 하는 삶’의 시작을 그렸습니다.
다음 화에서는 더 깊은 공백을 마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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