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야서재

박정호는 여덟 시가 넘어서야 눈을 떴다.
눈을 떴다는 표현이 맞는지 모르겠다.
정확히는,
눈을 감고 있어도 더 이상 잘 수 없다는 걸 깨달은 순간이었다.
천장을 바라보며 한참을 누워 있었다.
시계 초침 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어제보다 더 크게 들렸다.
출근을 하지 않는 아침은
생각보다 길었다.
시간이 늘어난 게 아니라,
기다릴 것이 없어진 탓이었다.
그는 몸을 일으켜 세면대로 향했다.
거울 속의 얼굴이 또 한 번 낯설었다.
오늘은 더 그랬다.
“괜찮아 보여야 하는 이유가 없구나.”
혼잣말처럼 흘러나왔다.
그러자 갑자기
힘이 빠졌다.
거실에서는 김미경이 이미 일어나 있었다.
라디오에서 낮은 음악이 흘러나왔다.
아침 방송이었다.
“오늘은 늦게 일어났네요.”
그녀가 말했다.
어제보다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그 자연스러움이
어디까지 허용되는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잠이 잘 안 와서.”
“그럴 수 있죠.”
그 말 뒤에는
이어지는 문장이 없었다.
둘 다 그게 더 편했다.
아침 식사를 마친 뒤
박정호는 소파에 앉았다.
신문을 펼쳤지만
기사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시계를 보았다.
아홉 시 십 분.
보통 이 시간엔
회의실에 들어가 있거나
보고서를 검토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문득
이 시간에 자신이 왜 집에 있는지
다시 생각해 보았다.
퇴직.
은퇴.
그 말들은
아직 몸에 붙지 않았다.
“잠깐 나갔다 올게.”
그가 말했다.
김미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묻지 않았다.
어디로 가는지,
언제 오는지.
그 역시
정해진 답이 없었다.
집 앞 공원을 걸었다.
평일 오전의 공원은
생각보다 사람이 많았다.
유모차를 끄는 사람,
강아지를 산책시키는 사람,
벤치에 앉아 있는 노인들.
그는 처음으로
자신이 어느 쪽에 속하는지
헤아려 보았다.
노인들 쪽이었다.
그 사실이
천천히 다가왔다.
마치 오래된 우편물처럼.
벤치에 앉아
잠시 눈을 감았다.
햇볕이 따뜻했다.
회사에서는 느껴보지 못했던 온기였다.
하지만
편안함보다는
허전함이 먼저 찾아왔다.
시간이 이렇게 많은데
쓸 곳이 없다는 생각.
핸드폰을 꺼냈다.
연락처를 넘겼다.
전화하고 싶은 사람이 있었지만
막상 누구에게 걸어야 할지 몰랐다.
회사 사람들은
이미 다른 하루를 살고 있을 테고,
친구들은
각자의 일정이 있을 터였다.
그는 핸드폰을 다시 넣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시계는 아직 열한 시도 되지 않았다.
아침이
끝나지 않고 있었다.
집에 들어오자
김미경이 빨래를 개고 있었다.
“벌써 왔어요?”
“응.”
그는 소파에 다시 앉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괜히 숨이 막혔다.
“집에 계속 있으면 답답하죠.”
김미경이 말했다.
위로처럼 들렸지만
조심스러운 거리감이 느껴졌다.
“나가서 뭐라도 해볼까 생각 중이야.”
“천천히 해도 돼요.”
그 말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천천히라는 말이
그를 더 불안하게 했다.
언제까지 천천히여도 되는 걸까.
언제부터는
움직여야 하는 걸까.
점심 시간이 다가왔지만
배가 고프지 않았다.
시간만 배회하고 있었다.
박정호는 다시 창가에 섰다.
어제와 같은 풍경.
같은 하늘.
하지만
자신만 다른 곳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아침이 길어졌다는 건
하루가 길어진다는 뜻이 아니라,
삶의 방향을 다시 찾아야 한다는 신호였다.
그는 아직
그 신호를
해석하지 못하고 있었다.
작가의 말 :
은퇴 이후 가장 먼저 달라지는 것은
시간의 속도입니다.
할 일이 없어진 아침은
생각보다 무겁고 길게 다가옵니다.
3화는 ‘머무는 시간’의 불안을 담았습니다.
다음 화에서는 가족 안의 균열이 드러납니다.
다른 곳에 퍼가실 때는 아래 고유 링크 주소를 출처로 사용해주세요.
http://www.psytimes.co.kr/news/view.php?idx=117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