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야서재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창밖이 흐렸고,
집 안도 덩달아 눅눅해졌다.
박정호는 소파에 앉아
리모컨을 쥔 채 멍하니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전화가 울렸다.
이번에는 모르는 번호였다.
“박정호 씨 맞으시죠?”
차분한 목소리의 여자였다.
은행이라고 했다.
“퇴직금 관련해서
상담을 조금 받아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그 말에
박정호는 잠시 대답하지 못했다.
상담.
도움.
그 단어들이
귀에 걸렸다.
“지금 괜찮으시면
지점으로 한 번 방문하셔도 되고요.”
“아… 네.”
그는 그렇게 답했다.
거절할 이유를
바로 떠올리지 못했다.
전화를 끊고 나자
마음이 불편해졌다.
마치
자신의 사정이
이미 누군가의 관리 대상이 된 것처럼 느껴졌다.
“어디 가요?”
김미경이 물었다.
“은행.”
“아, 잘됐네.
한번 정리해두는 게 좋지.”
그녀의 말은
현실적이었고,
틀리지 않았다.
그런데도
박정호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속이 불편했다.
은행 창구 앞에 앉자
직원이 서류를 펼쳤다.
젊은 얼굴이었다.
자신보다 한참 어렸다.
“현재 상황을 보면
당분간은 안정적으로 지내실 수 있습니다.”
안정적이라는 말이
위로처럼 들리지 않았다.
“다만,
추가적인 수입이 없을 경우를 대비해서
이런 상품들을 고려해보시는 게…”
직원은
차분하게 설명했다.
도표와 숫자가
눈앞을 채웠다.
박정호는
그 설명을 들으며
자신이
‘관리되는 사람’이 되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예전에는
결정을 내리는 쪽이었다.
이제는
설명을 듣는 쪽이었다.
“자녀분께서
도움 주실 수 있는 부분도
미리 상의해보시면 좋고요.”
그 말에
박정호는 고개를 들었다.
“아니요.”
그의 대답은
생각보다 단호했다.
직원은
당황한 듯 웃으며
다른 이야기를 이어갔다.
은행을 나서자
비가 더 세차게 내리고 있었다.
우산을 펴면서
그는 생각했다.
도움을 받는다는 건
이렇게
자존심을 깎는 일이었나.
집에 돌아오자
김미경이 말했다.
“어땠어요?”
“괜찮았어.”
그는 자동으로 대답했다.
괜찮다는 말은
이제
자신을 보호하는 말이 되어 있었다.
저녁 무렵,
아들이 집에 들어왔다.
“아버지,
필요하면 제가…”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박정호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다니까.”
조금
목소리가 높아졌다.
아들은 더 말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박정호를 더 작게 만들었다.
방으로 돌아온 그는
의자에 앉아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도움은
패배가 아니라고들 말한다.
하지만
그는 아직
그 말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도움을 받는다는 굴욕은
생각보다
깊게 남았다.
작가의 말 :
도움은
누군가에게는 선택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자존심의 문제입니다.
특히 스스로 책임져온 삶이 길수록
그 감정은 더 날카로워집니다.
10화는 ‘의존 앞에서 흔들리는 자존감’을 담았습니다.
다음 화에서는 고립의 선택을 마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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