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 이후의 시간 1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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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창밖이 흐렸고,

집 안도 덩달아 눅눅해졌다.

박정호는 소파에 앉아

리모컨을 쥔 채 멍하니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전화가 울렸다.

이번에는 모르는 번호였다.


“박정호 씨 맞으시죠?”


차분한 목소리의 여자였다.

은행이라고 했다.


“퇴직금 관련해서

상담을 조금 받아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그 말에

박정호는 잠시 대답하지 못했다.


상담.

도움.


그 단어들이

귀에 걸렸다.


“지금 괜찮으시면

지점으로 한 번 방문하셔도 되고요.”

“아… 네.”


그는 그렇게 답했다.

거절할 이유를

바로 떠올리지 못했다.

전화를 끊고 나자

마음이 불편해졌다.


마치

자신의 사정이

이미 누군가의 관리 대상이 된 것처럼 느껴졌다.


“어디 가요?”


김미경이 물었다.


“은행.”

“아, 잘됐네.

한번 정리해두는 게 좋지.”


그녀의 말은

현실적이었고,

틀리지 않았다.

그런데도

박정호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속이 불편했다.


은행 창구 앞에 앉자

직원이 서류를 펼쳤다.

젊은 얼굴이었다.

자신보다 한참 어렸다.


“현재 상황을 보면

당분간은 안정적으로 지내실 수 있습니다.”


안정적이라는 말이

위로처럼 들리지 않았다.


“다만,

추가적인 수입이 없을 경우를 대비해서

이런 상품들을 고려해보시는 게…”


직원은

차분하게 설명했다.

도표와 숫자가

눈앞을 채웠다.

박정호는

그 설명을 들으며

자신이

‘관리되는 사람’이 되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예전에는

결정을 내리는 쪽이었다.

이제는

설명을 듣는 쪽이었다.


“자녀분께서

도움 주실 수 있는 부분도

미리 상의해보시면 좋고요.”


그 말에

박정호는 고개를 들었다.


“아니요.”


그의 대답은

생각보다 단호했다.

직원은

당황한 듯 웃으며

다른 이야기를 이어갔다.


은행을 나서자

비가 더 세차게 내리고 있었다.


우산을 펴면서

그는 생각했다.

도움을 받는다는 건

이렇게

자존심을 깎는 일이었나.


집에 돌아오자

김미경이 말했다.


“어땠어요?”

“괜찮았어.”


그는 자동으로 대답했다.

괜찮다는 말은

이제

자신을 보호하는 말이 되어 있었다.


저녁 무렵,

아들이 집에 들어왔다.


“아버지,

필요하면 제가…”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박정호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다니까.”


조금

목소리가 높아졌다.

아들은 더 말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박정호를 더 작게 만들었다.


방으로 돌아온 그는

의자에 앉아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도움은

패배가 아니라고들 말한다.


하지만

그는 아직

그 말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도움을 받는다는 굴욕은

생각보다

깊게 남았다.




작가의 말 :

도움은

누군가에게는 선택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자존심의 문제입니다.

특히 스스로 책임져온 삶이 길수록

그 감정은 더 날카로워집니다.

10화는 ‘의존 앞에서 흔들리는 자존감’을 담았습니다.

다음 화에서는 고립의 선택을 마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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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6-01-15 09:4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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