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야서재

박정호는
연락처 목록을 한참 내려다보다가
손을 멈췄다.
이름 옆에
마지막 통화 날짜가 떠 있었다.
몇 년 전.
혹은
아주 오래전.
연락하지 않은 이유는
늘 비슷했다.
바쁘다는 말,
지금은 애매하다는 생각,
언젠가 보자는 약속.
그 ‘언젠가’가
얼마나 쉽게
사라지는지도
그는 이제 알았다.
그는
이도현의 이름을 눌렀다.
잠시 망설이다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
신호음이
길게 느껴졌다.
“어, 정호?”
도현의 목소리는
예전보다 낮았지만
여전히 활력이 있었다.
“시간 괜찮아?”
“응. 무슨 일이야?”
박정호는
숨을 한 번 고르고 말했다.
“그냥…
밥 한 끼 할까 해서.”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도현이 웃으며 말했다.
“야, 웬일이냐.
좋지.”
약속은
생각보다 쉽게 잡혔다.
전화를 끊고 나서
박정호는
괜히 거울을 보았다.
머리를 한 번 넘기고,
셔츠를 고쳐 입었다.
누구를 만나기 위해
준비하는 감각이
오랜만이었다.
약속 장소는
예전에 자주 가던 식당이었다.
간판은 그대로였지만
주변 풍경은
조금 달라져 있었다.
도현은
이미 와 있었다.
“정호야.”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흔들었다.
둘은
잠시 어색하게 웃었다.
악수를 할지,
어깨를 두드릴지
망설이다가
결국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 좋아졌네.”
도현이 말했다.
“거짓말.”
“아니, 진짜야.”
그 말이
의외로
기분 나쁘지 않았다.
밥을 먹으며
이야기는
천천히 풀렸다.
회사 이야기,
자식 이야기,
몸 이야기.
예전처럼
미래를 말하지는 않았다.
대신
지금의 상태를
조심스럽게 꺼냈다.
“퇴직하고 나니까
사람 만나는 것도
괜히 눈치 보이더라.”
박정호가 말했다.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래.
아직 회사 다닌다 해도
언젠가는 똑같아질 거잖아.”
그 말에
박정호는
처음으로
위로받는 기분이 들었다.
누군가와 비교하지 않고
같은 위치에서
이야기하고 있다는 느낌.
식사가 끝나갈 무렵,
도현이 말했다.
“우리…
가끔은 보자.”
그 말에는
형식적인 약속이 아닌
의지가 담겨 있었다.
“그래.”
박정호는
그 짧은 대답에
조금 힘을 실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그는 생각했다.
사람 속으로 들어간다는 건
대단한 결심이 아니라
이렇게
한 통의 전화에서
시작되는 걸지도 모른다고.
집에 도착하자
김미경이 물었다.
“누구 만났어요?”
“도현이.”
“어땠어요?”
박정호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괜찮았어.”
그 말에는
진짜 의미가 담겨 있었다.
그날 밤,
그는
혼자가 아니라는 감각을
아주 오랜만에 느꼈다.
다시,
사람 속으로
조금 들어간 기분이었다.
작가의 말 :
사람을 만나는 일은
용기가 필요한 선택입니다.
특히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 문턱은 더 높아집니다.
17화는 ‘관계를 다시 선택하는 순간’을 그렸습니다.
다음 화에서는
새로운 역할을 마주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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