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 이후의 시간 26화
기사 메일전송
기사수정


달력의 날짜를 지우는 일이

박정호에게는

이제 의미 없는 습관이 되었다.


무슨 요일인지,

며칠이 지났는지보다

하루가 어떻게 흘렀는지가

더 중요해졌다.


그는

아침 커피를 마시며

노트를 펼쳤다.


요즘은

매일 한 줄씩이라도

적으려고 했다.


‘오늘 할 일.’


그 아래에는

아직 빈칸이 많았다.

김미경이

식탁 맞은편에 앉으며 말했다.


“요즘

뭔가 계획 세우는 것 같네.”

“그런가.”

박정호는


펜을 돌리며 말했다.


“그냥…

시간을 좀

의미 있게 쓰고 싶어서.”


김미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한테

그럴 시간이 온 거지.”


그 말은

부추김도,

재촉도 아니었다.

있는 그대로의 인정이었다.


오후에

박정호는 혼자 산책을 나갔다.

동네를 벗어나

조금 더 멀리 걸었다.


길가에 있는

작은 도서관이

눈에 들어왔다.


예전에는

퇴근길에 스쳐 지나가기만 했던 곳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책 냄새가 났다.


조용한 공기 속에서

사람들이 각자 책을 보고 있었다.


박정호는

서가를 천천히 훑었다.

자기계발서도,

경영서도 아닌

에세이 코너에서

발걸음이 멈췄다.


‘노년의 삶에 대하여.’


그 문장이

괜히 마음에 걸렸다.

책을 한 권 꺼내

자리에 앉았다.

처음 몇 장은

집중이 잘 되지 않았다.


하지만

조금 지나자

문장이 천천히

몸 안으로 들어왔다.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는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는가보다

더 중요할 수 있다.’


그 문장을 읽고

박정호는

책을 덮었다.

머릿속이

조용해졌다.


남은 시간.


그 표현은

막연했지만

피할 수 없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그는 생각했다.

시간은

줄어들고 있는 게 아니라,

다른 형태로

주어지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저녁 식사 후,

박정호는

김미경에게 말했다.


“나…

주민센터 봉사

조금 더 해볼까 생각 중이야.”


김미경은

놀라지 않았다.


“좋은 생각이네.”

“아직

확실한 건 아니야.”

“괜찮아.

확실해질 때까지

생각해도 돼.”


그 말에

박정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남은 시간을

어떻게 쓸 것인가는

정답을 찾는 문제가 아니었다.


하루하루

선택해 나가는 일이었다.


그날 밤,

박정호는

노트에 이렇게 적었다.


‘남은 시간은

기다리는 게 아니라

만들어가는 것.’


아직은

미완성이었지만,

그 문장은

그의 하루를

조금 앞으로 움직이게 했다.




작가의 말 :

노년의 삶은

‘얼마나 남았는가’보다

‘어떻게 쓰는가’의 문제일지도 모릅니다.

26화는 ‘시간을 다시 설계하려는 마음’을 담았습니다.

다음 화에서는

선택에 대한 두려움을 마주합니다.

0
기사수정

다른 곳에 퍼가실 때는 아래 고유 링크 주소를 출처로 사용해주세요.

http://www.psytimes.co.kr/news/view.php?idx=12010
  • 기사등록 2026-02-09 09:09:16
기자프로필
프로필이미지
나도 한마디
※ 로그인 후 의견을 등록하시면, 자신의 의견을 관리하실 수 있습니다. 0/1000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