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채원
[한국심리학신문=허채원(cheaone1@naver.com ]
출처: Pinterest
빨간 사과는 빨갛지 않다. 무슨 말일까?
우리는 눈앞의 사과를 보며 의심 없이 '빨갛다'고 말한다. 하지만 사과에는 '빨간색'이 묻어 있는 것이 아니라 사과는 단지 특정 파장의 빛을 반사할 뿐이며, 그 빛을 받아들인 우리 눈의 세포가 뇌로 신호를 보내 '빨간색'이라는 주관적인 경험을 만들어낼 뿐이다. 색맹인 사람에게 그 사과는 빨갛지 않다.
결국 빨간색은 사과 속에 들어있는 '실체'가 아니라, 우리 뇌가 생존을 위해 만들어낸 '해석'이다.
우리의 행복도 이 사과와 똑같다. 사과 자체가 빨간 것이 아니라 우리 뇌가 그렇게 해석하는 것처럼, 행복 역시 객관적인 실체가 아니라 뇌가 만들어내는 주관적인 경험일 뿐이기 때문이다.
보통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사는가?"라는 질문에 "행복하기 위해 산다"라고 답한다. 이처럼 행복을 삶의 궁극적인 목적이자 도달해야 할 결실로 보는 '목적론적' 관점은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시작된 오래된 철학적 전통이다. 그러나 서은국 교수는 바로 이 아리스토텔레스적 행복관 때문에 현대인이 오히려 불행해졌다고 지적한다. 행복을 거창한 인생의 목적으로 설정하는 순간, 정작 뇌가 생존 신호로 보내는 일상의 구체적인 즐거움들을 외면하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화심리학의 차가운 눈으로 본 행복은 철저히 실용적이다. 행복, 정확히 말해 쾌감은 동물이 생존에 필요한 자원을 확보했을 때 뇌가 주는 보상이다.
배가 고플 때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행복감을 느낀다. 이는 뇌가 "영양분이 들어왔으니 이 행동을 계속해!"라고 보내는 신호다. 추운 겨울 따뜻한 곳에 들어갔을 때 느끼는 안도감 역시 마찬가지다. 만약 우리가 생존에 유리한 행동을 할 때 아무런 즐거움을 느끼지 못한다면, 인류는 진작에 멸종했을 것이다.
결국 인간은 행복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 행복을 느끼도록 설계되었다. 행복은 인생의 최종 목적지가 아니라, 우리가 계속해서 삶이라는 경주를 이어가게 만드는 미끼이자 신호등이다. 이 관점의 변화는 중요하다. 행복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내 몸이 어떤 생존 신호를 보내고 있는지 관찰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로또에 당첨되거나 고대하던 승진을 하면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은 행복을 느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기쁨은 오래가지 않는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쾌락의 쳇바퀴(Hedonic Treadmill)'라고 부른다. 뇌는 새로운 자극에 금방 적응하고, 행복감을 초기화한다.
왜 뇌는 이토록 잔인하게 행복을 빨리 지워버리는 걸까? 대답은 역시 생존에 있다. 어제 잡은 멧돼지의 포만감에 취해 오늘 사냥을 나가지 않는다면 그 개체는 굶어 죽을 것이다. 뇌는 다음 사냥을 독려하기 위해 어제의 쾌감을 깨끗이 비워내야만 한다. 따라서 행복은 '한 방'의 크기보다 얼마나 '자주' 느끼느냐가 핵심이다.
서은국 교수는 이를 "행복은 기쁨의 강도가 아니라 빈도"라고 정의한다. 1년에 한 번 가는 호화로운 해외여행보다, 매일 아침 마시는 향긋한 커피 한 잔과 동료와의 가벼운 농담이 우리를 더 지속적으로 행복하게 만든다. 행복의 전략은 커다란 복권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일상 속에 흩어진 작은 기쁨들을 얼마나 촘촘하게 배치하느냐에 달려 있다.
그렇다면 인간이라는 생명체의 뇌가 가장 강렬한 '행복 신호'를 보내는 지점은 어디일까? 진화의 기나긴 여정 속에서 인간에게 가장 위협적인 상황은 '고립'이었다. 무리에서 쫓겨나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반대로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은 가장 강력한 생존 보증 수표였다.
그래서 인류의 뇌는 타인과 함께 있을 때, 그리고 생존의 기본인 음식을 섭취할 때 가장 큰 쾌감을 느끼도록 고정되었다. 현대인이 맛집을 찾아다니고 소중한 사람과 식사하며 대화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말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같은 풍경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연결되어 있으니까요."라는 문장처럼, 거창한 언어적 소통이 없더라도 누군가와 같은 공간에서 온기를 나누는 행위는 뇌에게 "너는 안전하다"는 강력한 신호를 보낸다. 결국 행복의 본질은 복잡한 철학적 사유가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과 마주 앉아 맛있는 음식을 먹는 그 지극히 원초적이고 구체적인 경험에 수렴된다.
사과가 빨갛게 보이는 원리를 안다고 해서 사과의 맛이 변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사과가 왜 빨간지 이해하면, 우리는 더 적극적으로 잘 익은 사과를 찾아 나설 수 있다.
행복이 생존의 도구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삶의 허무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행복이라는 무거운 왕관을 내려놓고, 우리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가치 있는 삶'의 조건들을 채우느라 정작 내 뇌가 갈구하는 즐거움을 외면하고 있지는 않은가?
행복은 저 멀리 있는 이상향이 아니라,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과 나누는 따뜻한 국밥 한 그릇 속에 있다. "나는 언제 즐거움을 느끼는가?"라는 질문에 솔직해질 때, 우리는 비로소 뇌가 설계한 행복이라는 정교한 장치를 온전히 누릴 수 있게 될 것이다. 붉은 사과를 한입 베어 물 때의 그 선명한 쾌감처럼, 우리의 행복 또한 그렇게 구체적이고 일상적이어야 한다.
-참고자료 -
서은국.(2021). 행복의 기원. 21세기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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