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소개서 앞에 앉은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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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심리학신문=박성용 ]



쓸 말이 없네


책상에 앉았다. 노트북을 켜고 구인·구직 사이트를 뒤적이다가, 결국 워드 파일을 연다. 커서를 깜빡이며 한참을 멈춰 있다가 첫 문장을 쓴다. 그리고 지운다. 다시 쓴다. 또 지운다.


그간 한두 달 동안 자기소개서를 50장은 쓴 것 같다. 지원동기를 쓰려고 하면 머릿속에는 솔직한 문장이 먼저 떠오른다.

‘알바로 언제까지 살 수는 없고, 백수는 마음이 불편하고, 이제는 돈을 벌어야 할 것 같아서 지원했습니다.’

하지만 그 문장은 어디에도 쓸 수 없다. 대신 ‘귀사의 비전과 제 전공의 연관성에 깊이 공감하여…’라는 문장이 들어간다. 진심과 문장 사이의 간극은 점점 벌어진다.


성격의 장단점, 경험, 지원동기. 항목은 단순하지만, 그 안에 자신을 끼워 맞추는 일은 쉽지 않다. 결국 많은 취업 준비생은 같은 질문 앞에서 비슷한 고민에 빠진다.


자기소개서, '자기'가 사라지는 글


취업 준비 과정에서 가장 기묘한 경험 중 하나는 ‘자기소개서’를 쓰면서 오히려 자기 자신이 흐려진다는 점이다. 우리는 스스로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막상 500자, 1000자 안에 자신의 삶을 정리하려고 하면, 오히려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사람은 다양한 역할 속에서 살아가지만, 그것을 하나의 서사로 정리하는 경험은 많지 않다.즉, 우리는 살아왔지만 ‘정리해본 적은 없는 삶’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취업 준비생들은 종종 이런 감각을 느낀다.
“한 건 많았는데, 막상 쓰려니 아무것도 없다.”

이건 경험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경험을 ‘의미 있는 이야기로 재구성하는 훈련’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GPT 자소서


요즘 취업 준비생의 풍경에는 새로운 요소가 하나 추가됐다. 바로 ChatGPT 같은 생성형 AI다. ‘이 직무의 10년 차 선배처럼 자기소개서를 써줘’라고 입력하면, 몇 초 만에 훨씬 더 매끄럽고 완성도 높은 글이 나온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다들 이걸 쓰고 있을 텐데, 나는 어떻게 튀지?”

이 질문은 단순한 글쓰기 고민이 아니라 비교에서 비롯된 불안이다. 문제는 비교의 대상이 명확하지 않을수록 불안이 커진다는 점이다.


과거에는 비교 대상이 주변 친구 몇 명이었다면, 지금은 보이지 않는 수많은 경쟁자들이다. 그들이 얼마나 잘 썼는지, 무엇을 썼는지 알 수 없다.이 불확실성은 취업 준비생을 끊임없이 의심하게 만든다.


  • 이게 맞는 글일까, 더 잘 쓸 수 있는 건 아닐까, 나는 부족한 건 아닐까. 결국 자기소개서는 글이 아니라 불안을 증폭시키는 장치가 되기도 한다.


선택의 과잉, 결정하지 못하는 사람들


취업 준비 과정은 선택의 연속이다. 어떤 회사에 지원할지, 어떤 경험을 강조할지, 어떤 문장을 쓸지 끊임없이 결정해야 한다.


하지만 선택지가 많아질수록 사람은 더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 수십 개의 채용 공고, 수많은 합격 자기소개서 사례, 그리고 AI가 만들어주는 무한한 문장들. 아이디어는 넘치지만, 그중 하나를 선택하는 순간 나머지를 포기해야 한다. 그래서 사람은 쉽게 결정을 미루고, 결국 마감에 쫓겨 글을 완성한다.


아이러니하게도, 많은 취업 준비생들은 마감 직전에 가장 생산적이 된다. 인간은 압박이 있을 때 비로소 선택을 강제받고, 추상적인 고민을 구체적인 행동으로 바꾸기 때문이다.


‘잘 쓰는 사람’보다 ‘버티는 사람’


취업 준비를 오래 할수록 사람들은 깨닫는다. 이 과정이 단순히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물론 글을 잘 쓰는 사람, 경험이 많은 사람이 유리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요소는 따로 있다.


계속 쓰는 사람, 계속 지원하는 사람, 계속 버티는 사람. 실패와 거절을 경험하면서도 다시 시도할 수 있는 능력이다.


취업 준비는 결과가 즉각적으로 나오지 않는 과정이다. 수십 번의 지원, 수차례의 탈락을 겪으면서도 자신을 유지해야 한다.그래서 이 과정은 단순한 스펙 경쟁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는가의 문제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다시 쓰는 이유


그럼에도 우리는 다시 워드 파일을 연다. 문장을 쓰고, 지우고, 다시 쓴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서도 제출 버튼을 누른다.


이 과정은 비효율적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자기소개서를 쓴다는 것은 단순히 회사를 설득하는 일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다시 정리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과정 속에서 조금씩 알게 된다. 내가 무엇을 해왔는지,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어디로 가고 싶은지. 완벽한 문장은 아닐지라도, 그 문장들은 결국 지금의 나를 설명하는 가장 솔직한 기록이 된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는 다시 쓴다. 잘 쓰기 위해서가 아니라, 끝내 나를 이해하기 위해서.


*참고문헌*

  • 배리 슈워츠, 『선택의 역설(The Paradox of Choice)』, 형선호 옮김, 웅진지식하우스, 2005.
  • 레온 페스팅거, 『인지부조화 이론(A Theory of Cognitive Dissonance)』, 스탠퍼드대학교 출판부, 1957.
  • 레온 페스팅거, 「사회적 비교 과정 이론(Social Comparison Theory)」, 『Human Relations』, 1954.
  • 앤절라 더크워스, 『그릿(Grit)』, 김미정 옮김, 비즈니스북스, 2016.
  • 마틴 셀리그먼, 『긍정심리학(Flourish)』, 우문식 옮김, 물푸레,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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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6-04-13 10: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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