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민
[한국심리학신문=이경민 ]

필자는 최근에 아주 재미있는 웹소설을 읽게 되었다. 문장 하나하나가 잘 살아 있고, 캐릭터도 매력 있고, 이야기의 완급도 훌륭했다. 그런데 분명 예전의 나라면 여기서 끝낼 리가 없었다. 좋았던 장면을 무한히 돌려보고, 이 문장이 왜 나왔는지 곱씹고, 나와 같은 사람들을 찾아 커뮤니티를 기웃거리며, 이 캐릭터들의 다른 이야기를 상상해 나갔을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번에는 그 지점에서 그냥 멈추고 말았다. ‘재밌네’ 하고 책장을 덮고, 그대로 다음 할 일을 하러 가버린 것이다.
이 감각이 너무 낯설었다. 나는 분명 무언가 하나를 좋아하면 정말 불나방처럼 달려드는 사람이었다. 좋아하는 작품이 생기면, 생활 리듬이 작품에 맞춰지는 게 당연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새, 좋긴한데 거기까지다. 뜨겁게 빠져들지 않고, 적당히 선을 긋고 좋아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더 놀라운 건, 이런 경험을 친구들에게 털어놓으면 다들 비슷한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점이다. 자신도 사춘기 때만큼 무언가를 좋아할 수 없다고, 또는 중학교 때 열렬히 보던 만화를 다시 틀어보니 이제는 도저히 못 보겠더라고, 그런 이야기들 말이다.
어떻게 보면 지금의 상태가 더 ‘적응적’일지도 모른다. 삶을 언제까지나 불나방처럼 살 수도 없고, 무언가가 너무 좋다고 현재의 삶을 내던지고 그것만 붙잡고 있을 수도 없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렇게 열정을 다해 눈을 반짝이던 시간들이 그리운 것도 사실이다. 도대체 우리는 언제, 어떻게 이렇게 변해버린 걸까.
사춘기 시절에 가능했던 그 ‘강렬함’
흔히 사춘기를 “감정의 롤러코스터”라고 부르지만, 실제 연구 결과는 이보다 조금 더 흥미롭다. 여러 종단 연구에 따르면 분노와 슬픔 같은 감정의 변동성 자체는 오히려 청소년기를 거치며 점차 선형적으로 감소하고, 불안의 변동성 역시 초기 청소년기에 정점을 찍은 뒤 후기로 갈수록 낮아진다. 하지만 분노, 슬픔, 불안 같은 부정 정서의 ‘강도’ 자체는 중·후기 청소년기에 최고조(역 U자형 궤적)에 이르기 때문에, 이 시기 특유의 감정적 경험이 유독 강렬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즉, 단순하게 말하면 사춘기에는 같은 감정을 느껴도 몸과 마음이 “더 세게” 반응하는 시기가 존재하는 셈이다.
이런 강렬함은 뇌 발달과도 연결된다. 8세에서 29세까지를 추적한 fMRI 연구에 따르면, 금전적 획득 등 보상 자극에 반응하는 뇌의 복측선조체 활성은 청소년기(약 16~17세 경)에 정점에 이른다. 비록 이 실험이 동전 따기 도박 게임(금전적 보상)으로 진행되었지만, 이는 사춘기 시기에 전반적으로 보상을 적극적으로 추구하는 성향이 클수록 보상 회로가 과장되게 활활 타오르는 패턴을 보여준다. 반면 후기 청소년기에서 성인기로 넘어가면서부터는 보상으로부터 얻는 순간적인 쾌감(hedonic pleasure)이 줄어듦에 따라 뇌의 반응 양상도 함께 감소한다. 이러한 사춘기의 높은 보상 민감도는 우리가 무언가에 푹 빠져들 때 느끼는 짜릿함과도 맞닿아 있다.
이 시기의 강렬함은 이른바 ‘덕질’과도 깊게 얽혀 있다. 14~15세(9학년) 여학생 107명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 따르면, 참여자의 대다수(94%)가 TV나 영화 캐릭터, 혹은 유명 연예인 등 자신이 좋아하는 미디어 인물에게 각별한 애정을 품고, 마치 실제 관계처럼 친밀함을 느끼는 ‘파라소셜 상호작용(parasocial interactions)’을 경험한다고 보고했다. 연구자들은 이런 경험이 청소년기의 정체성 탐색 및 자율성 발달 과정과 연결된다고 해석한다. 좋아하는 인물이나 작품 세계에 깊이 빠져드는 것은 단지 과몰입이 아니라, 아무런 거절의 두려움 없이 이상적인 대상을 향해 “나는 어떤 사람이고, 무엇을 멋있다고 느끼는가”를 투사해 보는 발달 과정의 일부인 것이다. 그렇기에 사춘기의 덕질은 감정의 세기와 정체성의 무게가 동시에 실려 훨씬 강렬하게 느껴지기 쉽다.
어른이 되며 우리는
그렇다면 왜 어른이 되면 예전만큼의 열기로 무언가를 사랑하기 어려워지는 걸까. 한 가지 축은 감정과 보상 시스템의 자연스러운 완화다. 앞서 말한 것처럼, 보상 관련 뇌 영역의 과민한 활성은 청소년기에 정점을 찍고 이후 성인기에 이르며 서서히 줄어든다. 동시에, 감정을 조절하는 전략 또한 나이가 들며 발달한다. 정서 조절 발달 연구들에 따르면, 청소년들은 성장함에 따라 점차 단일한 감정 조절 전략에서 벗어나 상황에 맞춰 여러 방식을 유연하게 선택하는 ‘다양성 높은’ 레퍼토리로 이동하는 경향이 관찰된다. 이는 한편으로는 어릴 때처럼 하나의 강렬한 감정에 무방비로 휩쓸리지 않고, 좀 더 다양한 방식으로 대처하게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 변화는 일상 경험에서 “뜬금없이 폭주하는 감정”이 줄어든다는 장점과 동시에, “나도 모르게 스스로를 식혀버린다”는 체감으로 돌아오기도 한다. 예전 같으면 밤새도록 같은 장면을 돌려보며 가슴을 부여잡았을 텐데, 이제는 어느 순간 마음속에서 브레이크가 작동한다. 내일 아침 일정, 해야 할 일, 체력과 시간 같은 현실적 제약이 자동으로 떠오르고, 감정의 최고조에 도달하기 전에 슬며시 한 발짝 물러선다. 감정 조절의 효율과 다양성이 늘어나면서, 체감상 “예전의 나”와는 다른 방식으로 무언가를 좋아하게 되는 시기가 온다.
또 다른 축은, 정체성과 관계 맥락의 변화다. 사춘기에는 좋아하는 작품이나 미디어 인물이 ‘나라는 사람’을 설명해주는 거의 전부가 되기도 한다. 이때의 파라소셜 경험은 실제 관계만큼이나 중요한 정체성 실험장이 된다. 반면 성인이 되면 일, 학업, 연애, 우정 등 실제로 상호작용하는 관계와 역할이 훨씬 복잡해지고, 그 안에서 얻는 자기 정체감의 비중이 커진다. 그러면 하나의 작품이나 캐릭터에 나의 모든 것을 걸어둘 필요가 점차 사라진다. 좋아하는 것은 여전히 중요하지만, “인생의 전부” 자리에는 다른 여러 조각들이 함께 들어와 앉는다. 그 결과 덕질의 온도는 다소 내려가지만, 대신 삶 전체의 온도는 좀 더 고르게 유지되는 쪽으로 옮겨가는 셈이다.
지금이니까 사랑할 수 있을지도
정서 발달 연구들을 보면, 감정은 단순히 ‘세졌다가 약해지는’ 직선이 아니라, 발달 과정 속에서 형태를 바꿔가며 변한다. 사춘기에는 정서의 강도가 최고조에 달하고 그 감정을 다루는 기술은 아직 단조로울 수 있다. 하지만 어른이 되면서는 감정 조절 전략의 레퍼토리가 다양해지고, 무엇에 에너지를 쓸지 융통성 있게 조율하는 능력이 생긴다. 보상 시스템 또한 가장 쾌감에 민감하게 타오르던 사춘기의 패턴에서 서서히 재조정된다. 같은 장면을 보더라도, 그 속에서 찾는 즐거움의 결은 분명 달라진다.
이 관점에서 보면, 지금 우리가 느끼는 약간의 ‘미지근함’은 꼭 열정이 사라졌다는 신호만은 아닐 수 있다. 예전에는 하나의 작품에 전부를 걸고 타올랐다면, 지금은 그 작품을 삶의 여러 조각 중 하나로 두고 다른 관계와 일, 나 자신을 함께 돌보는 쪽을 선택하는 것이다. 사춘기의 덕질이 정체성을 시험해보는 불꽃놀이였다면, 어른의 덕질은 이미 어느 정도 자라난 나무를 꾸준히 돌보는 정원 가꾸기에 가깝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지금의 시간을 사랑할 수 있을까. 아마 하나의 답은, “지금 이 시기의 나만이 느낄 수 있는 방식으로”라는 말일 것이다. 예전처럼 밤을 새워 댓글을 뒤지는 일은 힘들지라도, 지금의 성숙한 감각으로만 읽어낼 수 있는 장면들이 있다. 흐르는 물처럼 우리는 계속 변해가고, 1년이 지나고 몇 년이 지나면 지금의 감정과 즐거움은, 같은 작품을 다시 보더라도 더 이상 같은 모습으로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지금 내 앞에 너무 재밌는 것이 있다면, 현생이 허락하는 한도 안에서만큼은 마음을 다해 즐겨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예전과는 다른 온도지만, 지금의 나로서만 가능한 방식으로, 충분히 뜨겁게.
*참고 문헌
1) Theran, S. A., Newberg, E. M., & Gleason, T. R. (2010). Adolescent girls' parasocial interactions with media figures. The Journal of Genetic Psychology, 171(3), 270–277
2) Schreuders, E., Braams, B. R., Blankenstein, N. E., Peper, J. S., Güroğlu, B., & Crone, E. A. (2018). Contributions of reward sensitivity to ventral striatum activity across adolescence and early adulthood. Child Development, 89(3), 797–810.
3) Fombouchet, Y., Pineau, S., Perchec, C., Lucenet, J., & Lannegrand, L. (2023). The development of emotion regulation in adolescence: What do we know and where to go next? Social Development, 32(4), 1227–1242.
4) Galarneau, E., Lischetzke, T., Li, X., De France, K., Lougheed, J. P., & Hollenstein, T. (2026). Developmental stability and change in emotion regulation strategies and strategy repertoires across adolescence. Journal of Research on Adolescence, 36, e70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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