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채린
[한국심리학신문=백채린 ]
왜 우리는 가짜 인물에 진짜처럼 반응할까
우리는 소설, 영화, 드라마, 만화 속 인물이 겪는 기쁨, 그리고 고통에 쉽게 휩쓸리고, 실제처럼 반응한다. 때로는 현실의 인간관계 속 누군가보다 가상의 인물의 서사에 더 강하게 감정이 흔들리기도 한다. 이야기가 끝난 뒤에도 그 세계를 떠나지 못하고 이야기를 확장해 이후의 삶을 상상하거나 2차 창작으로 서사를 이어가기도 한다. 이처럼 작품 안에만 존재하는 가상의 인물에 깊이 몰입하는 현상은 단순히 취향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인간의 인지 및 정서 구조와 밀접하게 연결된 심리적 메커니즘이다.
감정을 따라가는 뇌: 공감이라는 기본 장치
이야기를 볼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인물의 감정을 따라간다. 캐릭터가 누군가와 이별하면 마음이 아리고, 사망 장면에선 눈물이 차오른다. 슬픈 순간엔 함께 울컥하고, 기쁜 순간엔 덩달아 기분이 올라간다. . 이 모든 반응의 바탕엔 공감(empathy)이 있다. 인간은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고 함께 느끼며, 더 나아가 이에 대해 생각해보는 공감과 정서가 존재한 존재로서 발달해 왔다. 중요한 것은 이 공감의 대상이 반드시 현실의 사람에게만 작동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인간의 뇌는 서사 속 인물도 ‘사회적 대상’으로 처리하는 경향이 있다. 이야기 구조 속에서 인물의 감정과 상황이 충분히 구체적으로 제시될 경우, 독자는 그 감정을 자신의 것처럼 시뮬레이션한다. 이른바 정서적 시뮬레이션(emotional simulation)이다. 서사에 대한 몰입으로서 독자는 이야기 속 세계로 ‘이동’하는 듯한 심리 상태를 가진다. 이야기의 감정과 가치가 더 강하게 내면화되면서 이야기 속 인물의 성공에 실제처럼 기뻐하고, 상실에 깊이 슬퍼한다.
“그게 나라면?”: 동일시의 시작
몰입이 깊어지면 단순히 감정을 이해하고 따라가는 수준을 넘어. 인물의 자리에 자신을 놓고 그 입장에서 세계를 바라보는 상태가 된다. 바로 동일시(identification)다. 독자는 스스로가 해석한 캐릭터의 특징과 감정을 바탕으로 “저 인물이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라는 가정을 무의식적으로 수행한다. 자신의 가치관, 경험, 욕망을 인물에게 투사하며, 반대로 작품 속 인물의 서사와 특징 역시 스스로에게 투사하기도 한다. 작품을 보는 동안 캐릭터와 쌓인 라포(Rapport), 즉 친근감과 심리적 공감대가 깊어질수록 우리는 투사와 자아 의탁을 통해 작품 속 인물의 삶을 간접적으로 살아보는 듯한 상상을 경험하게 된다.
대신 살아보는 삶, 대리 경험
동일시가 무의식적으로 반영되면서, 우리는 현실에서 선택하지 못하거나 시도하지 못하는 행동을 실행하는 캐릭터에 강한 쾌감을 느낀다. 바로 대리 경험(vicarious experience)이다. 우리는 현실에서 ‘해야 하는 것’과 ‘하고 싶은 것’ 사이의 긴장 속에 살아간다. 그러나 서사 속에서는 그 긴장을 인물이 대신 감당하고, 때로는 우리가 하지 못한 선택을 실행한다. 외모와 재력, 초현실적 능력을 가진 비현실적 인물이 되어 위험을 감수하거나, 금기를 넘는 선택, 일상에서는 관계를 끊어버리는 선택 등을 인물이 대신 수행할 때, 독자는 일종의 해방감, 카타르시스(catharsis)를 느낀다. 억압된 감정이나 욕망이 안전한 방식으로 배출되며 정서적 균형이 회복되는 것이다.

이야기는 감정을 시험해보는 공간이다.
우리는 이야기 속에서 사랑, 배신, 상실, 후회 같은 감정들을 미리 겪어본다. 그러나 작품은 본질적으로 비현실적 공간이기 때문에, 이것이 현실의 인간관계와 사회생활에 직접적으로 연결되기엔 일종의 괴리가 있다. 인물의 선택과 결과는 서사적 완성도를 위해 정리되어 있고, 감정 역시 극적으로 압축되거나 강조된다. 반면 현실의 인간관계는 훨씬 복잡하고 모호하다. 말 한마디, 타이밍 하나에도 관계가 달라지고, 어떤 감정은 명확하게 정리되지 않은 채 오래 남는다. 이 차이를 인식하지 못하면 이야기 속 감정의 방식이 현실에도 그대로 적용될 것처럼 기대하게 된다.
우리는 가상의 인물을 매개로 자신의 가능성과 욕망, 그리고 감정을 탐색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야기를 통해 감정을 확장하고 이해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나, 그것을 그대로 현실에 옮겨오지는 않는다. 이야기 속 경험은 하나의 참고가 될 수는 있어도, 기준이 될 수는 없다. 자연스럽게 인물에게 감정을 쏟게 되고 몰입하되, 몰입과 거리 두기 사이를 오가는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우리가 이야기를 건강하게 즐기는 방식일 것이다.
<참고문헌>
1) 임인재, 나은영 and 김승현. (2019). 판타지 드라마 주인공의 초현실적 능력과 몰입: 의사사회적 상호작용과 판타지 충족감의 매개 역할. 언론정보연구, 56(2), 290-329.
2) 구슬기, 전종우. (2017). 드라마의 스토리 요소와 등장인물의 일치성, 시청자의 자아 존중감이 드라마 몰입과 만족에 미치는 영향. 언론정보연구, 54(4), 177-212.
3) 김태훈. (2015). 공감(Empathy)에 관한 연구. 초등도덕교육, 47, 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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