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찬희
[한국심리학신문=조찬희(byliner_cho@naver.com)]
야구는 흔히 기록의 스포츠로 불린다.
그러나 기록의 숫자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순간이 있다.
흔들리는 투수의 손끝, 무너지는 자신감, 압박 속 선택의 순간들.
‘다이아몬드 위의 심리학자들’은 야구 속 숨겨진 인간의 마음을 따라간다.
이 연재는 다이아몬드 위에서 싸우는 사람들의 마음에 대한 기록이다.
1점으로 앞선 9회 말 2아웃, 주자 만루. 그리고 타석엔 4번 타자.
마무리 투수의 표정은 흔들리지 않는 듯하다.
초구, 타자 바깥쪽으로 멀리 빠지는 직구.
관중석이 술렁이기 시작하고, 중계 화면은 투수의 얼굴에 집중한다.
야구팬들은 말한다. “멘탈 흔들린다”라고.
스포츠에서 선수의 심리는 단순히 의지 부족, 집중력 부족으로 단순하게 소비된다. 실책을 하면 선수로서의 자질이 부족하다고 말하고, 슬럼프에 빠지면 자신감을 잃었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선수들의 흔들림은 단순한 능력 부족으로 설명되는 문제가 아니다. 반복된 실패가 집중력을 무너뜨리기도 하고, 부상에 대한 트라우마가 플레이를 위축시키기도 한다.
야구는 기록의 스포츠다. 하지만 그 기록을 만드는 것은 매 순간 심리적 압박 속에 놓인 인간이다. 그렇기에 때로 승부는 선수 개인의 신체적 역량보다 흔들리는 심리를 얼마나 잘 통제할 수 있는가에 달려있기도 하다.
주자 신경 쓰지 말고 편하게 해
만루 위기에 몰린 투수를 향해 투수코치가 올라와 어깨를 두드리며 ‘주자 신경 쓰지 말고 편하게 해’라고 말한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신경 쓰지 말라는 말이 사방에서 압박하는 주자의 존재를 더 의식하게 한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아이러니 과정 이론(Ironic process theory, 역설적 과정 이론)으로 설명한다. 아이러니 과정 이론은 미국의 심리학자 다니엘 웨그너(Danial Merton Wegner)가 ‘흰곰 실험’을 통해 밝혀낸 이론이다.
흰곰 실험은 1987년 웨그너가 학생을 두 그룹으로 나눠 한 그룹은 흰곰을 생각하라고 요청했고, 다른 그룹에게는 흰곰을 생각하지 말라고 요청했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흰곰이 생각날 때마다 종을 치라고 지시했다. 그 결과, 종을 더 많이 올린 그룹은 흰곰을 생각하지 말라고 요청받은 그룹이었다.
뇌는 특정 생각을 억제할수록 그 생각에 집중하게 된다. 특정 생각을 지우려는 노력 자체가 그 대상에 대한 인식으로 남아 끊임없이 존재를 상기시킨다.
만루 상황에 놓인 투수에게 주자는 흰곰과 같다. 머릿 속에서 주자에 대한 생각을 지워야 한다는 강박에 갇혀 주자를 더 의식하게 된다는 것이다. 손가락에서 빠지는 폭투 하나가 실점으로 이어진다는 긴장과 주자를 머릿 속에서 지워야 한다는 강박이 더해져 투수의 심리적 압박감은 2배가 된다.
이번에도 삼진 일 거 같은데
타석으로 타자가 터벅터벅 걸어들어온다. 36타석 연속 무안타. 더그아웃의 동료들은 파이팅으로 기를 살려주고, 관중석의 팬들은 목청 높이 응원가를 부르며 힘을 보탠다. 그러나 타자에게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그리고 속으로 ‘이번에도 삼진일 거 같은데’를 되뇌인다.
슬럼프에 빠진 타자들은 타석에서 공통적인 모습을 보인다. 자기 스윙을 다하지 못하고, 소극적으로 타석에 임하며, 직구 타이밍에 배트가 늦고 유리한 카운트에서도 한가운데 실투를 놓치고 만다. 해설진은 슬럼프에 빠진 타자를 보며 ‘생각이 너무 많다’, ‘단순하게 생각해야 한다’고 말하곤 한다.
타자의 슬럼프가 길어지는 이유는 타석에 들어서며 되뇌인 한 마디에 있다. ‘이번에도 삼진일 거 같은데’.
심리학에서는 이런 상황을 자기 충족적 예언(Self-fulfilling Prophecy)으로 설명한다. 미국의 사회학자인 윌리엄 아이작 토마스(William Issac Thomas)가 발견한 자기충족적 예언은 사람이 다가오지 않은 어떤 상황을 현실이라고 규정·생각한다면 결국 그 상황은 현실이 된다는 현상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예상한 결과에 맞춰 무의식적으로 행동을 바꾸게 된다는 것이다.
타자는 타석에 들어서면서부터 자신감이 떨어진 채, 자신이 삼진당할 것이라 예상한다. 그리고 그 예상은 불안으로 변해 타자의 움직임에도 영향을 미친다. 삼진을 두려워하는 타자는 적극적으로 스윙하지 못하고 삼진을 당하지 않기 위한 소극적인 스윙을 보인다. 그러나 소극적인 스윙은 오히려 타이밍을 늦추며 예상했던 삼진이라는 결과로 이어진다.
중요한 건 꺾였는데도 그냥 하는 마음
만루 위기에 놓인 투수는 주자를 지우려고 했고, 슬럼프에 ᄈᆞ진 타자는 삼진을 피하려고 했다. 야구선수 뿐 아니라 사람들은 종종 불안의 숙주를 없애야 최고의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 착각하곤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불안을 없애려는 시도가 오히려 불안을 증폭시키며 집중을 무너뜨리기도 한다.
중요한 순간에 긴장하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다. 마운드 위의 투수, 타석에 선 타자, 중간고사를 앞둔 학생, 면접 대기 중인 취준생까지 모두 같은 마음을 안고 있다.
중요한 건, 불안을 지우는 것이 아닌 불안 속에서도 자신이 해야 할 행동에 집중하는 일이다. 투수는 주자를 지우는 데에 집중하는 것이 아닌 포수의 미트에 집중해야 하고, 타자는 삼진을 의식하지 말고 자신의 스윙을 다해야 한다. 불안과 긴장을 통제하려 할수록 몸은 굳어가지만, 지금 해야할 플레이에 집중할 때 굳었던 몸은 다시 부드러워 진다. 자신의 플레이에 집중했을 때 자연스레 따라오는 결과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멘탈이 강한 사람은 긴장하지 않는 사람,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다. 불안과 압박을 느끼면서도 자신의 플레이를 이어 가는 사람이 멘탈이 강한 사람이다.
방송인 박명수는 ‘중꺾마(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의 유행에 대응하여 ‘중요한 건 꺾였는데도 그냥 하는 마음’이라는 말을 남겼다.
흔들리지 않는 것이 중요하는 것이 아니라, 흔들려도 다시 나의 직구를 던지고, 나의 스윙 궤적을 완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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