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소은
[한국심리학신문=심소은(zzzz7435@naver.com)]

가까운 사람에게 말 못한 속마음을, 처음 만난 낯선 이에게 털어놓은 경험이 있는가? 익명 커뮤니티에 가족에게도 말 못한 고백을 올린 적이 있는가? 혹은 여행지에서 우연히 만난 외국인에게 삶의 고민을 털어놓고, 헤어질 때 이상하리만큼 홀가분했던 기억이 있는가? 이건 외로움이나 충동이 아니다. 심리학은 이 현상을 오래전부터 ‘낯선 사람 효과(Stranger-on-a-Train Effect)’라고 설명해 왔다. 이는 기차 안 옆자리 승객에게 속마음을 털어놓는 현상에서 유래한 개념이다. 기차가 목적지에 도착하는 순간 관계는 자연스럽게 끝난다. 그 한시성(限時性)이 오히려 대화를 깊게 만든다. 지금 대화하는 이 사람을 다시 만날 일이 없다는 사실이 심리적 위험 부담을 걷어내면서 평소엔 꺼내지 못했던 말들이 밖으로 나온다. 연구자들은 이처럼 끝이 정해진 관계에서 자기노출의 깊이가 유의미하게 높아진다는 것을 반복적으로 확인했다.
낯선 사람이 가장 편한 사람이 되는 이유
그렇다면 왜 우리는 끝이 정해진 일시적 관계에서 자신을 잘 드러내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심리학자들은 자기노출이 일어나는 조건 자체를 분석하기 시작했다. 심리학자 알트만과 테일러는 인간의 자기노출을 양파 껍질에 비유하며 ‘사회적 침투 이론(Social Penetration Theory · Altman & Taylor, 1973)’을 제시하였다. 여기서 자기노출은 취미나 직업 같은 표면적인 정보부터 시작해서 가치관이나 감정 같은 핵심적인 내면으로 점점 깊어지는 구조다. 이 이론의 핵심 통찰은 노출의 깊이가 꼭 관계의 친밀도에 비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자기노출이 일어나려면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첫째는 상대가 공감해 줄 것이라는 기대감이고 둘째는 자신을 드러냈을 때 잃을 것이 없다는 안도감이다. 낯선 사람은 이 두 조건을 동시에 충족한다. 나를 판단할 맥락도 없고, 앞으로 다시 볼 이유도 없다. 좀 더 직설적으로 말하면, 애초에 나와 관계성이 없던 사람이기에 잃을 게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친밀도가 전혀 없어도 오히려 낯선 사람에게 자기노출을 하는 것이 굉장히 편하게 느껴진다.
익명성의 긍정적 효과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아무리 다시는 안 볼 사람 앞이라도 자신을 완전히 다 오픈하는 건 어렵지 않을까? 그러면 그 마지막 억제를 무장해제 시키는 요인은 무엇일까? 심리학자 존 슐러는 그 열쇠가 '익명성' 자체에 있다고 보았다. 슐러는 익명성이 보장될 때 사람들이 평소에는 꺼내지 않을 이야기를 꺼낸다는 것을 밝혔는데, 이를 ‘온라인 탈억제 효과(Online Disinhibition Effect · John Suler, 2004)’라고 한다. 이 탈억제는 두 방향으로 나타난다. 악플처럼 공격성이 터져 나오기도 하지만, 반대로 숨겨둔 취약함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방향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슐러는 후자를 '양성적 탈억제(benign disinhibition)'라고 불렀다. 나의 이름과 신분을 모르는 상대 앞에서 우리는 비로소 방어막을 내려놓는다. 그렇기에 우리는 익명성을 악플이나 타인을 향한 비난을 쏟아내는 데 활용하지 말고, 그 누구에게도 쉽사리 말하지 못했던 것들을 공유하며 위로가 되어주는 데 활용함으로써 익명성을 긍정적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
끝이 정해진 일시적인 관계이기 때문에 솔직해지고(낯선 사람 효과), 잃을 것이 없기 때문에 깊어지며(사회적 침투 이론), 나의 신분이나 정보를 상대방에게 알릴 필요가 없기 때문에 비로소 열린다(탈억제 효과). 익명 커뮤니티에 올라오는 가족도 모르는 병, 말 못한 이직 고민, 오래 묻어둔 상처 등에 대한 고백들이 때때로 놀랍도록 진심 어린 공감을 이끌어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물론 가까운 사람과의 깊은 신뢰를 대체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때로는 아무것도 잃을 게 없는 관계에서,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사람 앞에서, 우리는 비로소 솔직해질 수 있다. 익명은 가면이 맞다. 하지만 그 가면은 나를 숨기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나를 드러내기 위한 것일 수 있다. 당신이 오늘 낯선 사람에게 한 마디를 꺼냈다면, 그건 외로움이 아니라 나를 표현할 용기였을지도 모른다.
*참고자료
1) Altman, I., & Taylor, D. A. (1973). Social penetration: The development of interpersonal relationships. Holt, Rinehart & Winston.
2) Rubin, Z. (1975). Disclosing oneself to a stranger: Reciprocity and its limits. Journal of Experimental Social Psychology, 11(3), 233–260. https://doi.org/10.1016/S0022-1031(75)80025-4
3) Suler, J. (2004). The online disinhibition effect. CyberPsychology & Behavior, 7(3), 321–326. https://doi.org/10.1089/1094931041291295
4) Jourard, S. M., & Friedman, R. (1970). Experimenter-subject "distance" and self-disclosure. Journal of Personality and Social Psychology, 15(3), 278–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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