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면서 돈 쓴다"…러닝이 취미가 아닌 ‘정체성‘이 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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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심리학신문=편집부 ]


"달리면서 돈 쓴다"…러닝이 취미가 아닌 '정체성'이 된 이유


퇴근 후 러닝화 끈을 묶으며 오늘 뛸 코스를 스마트워치에 설정한다. 크루 단체 채팅방에는 벌써 몇 명이 '오늘 나온다'는 메시지를 올렸다. 달리기 하나에 러닝화, 의류, 영양 보충제, 크루 참여비까지 한 달에 수십만 원을 쓰면서도 전혀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요즘 도심 곳곳에서 러닝 크루가 눈에 띄게 늘었다. 유통업계에서는 이 현상에 '러닝노믹스'라는 이름을 붙였을 정도다. 단순한 운동 붐이라고 보기엔 무언가 더 깊은 심리가 작동하고 있다. 왜 사람들은 지금 이토록 '달리기'에 매달리는 걸까.



달리기가 소비를 부르는 이유: '정체성 소비'의 심리학


러닝이 단순한 운동을 넘어 하나의 라이프스타일 정체성으로 자리잡으면서 소비 패턴도 달라졌다. 러닝화 한 켤레로 시작했던 것이 전용 의류, 영양 보충제, 크루 참여, 대회 참가비로 번져간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정체성 소비(identity-based consumption)'라고 부른다. 물건을 사는 게 아니라,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사는 셈이다.


웬디 류 미국 피츠버그대 마케팅학과 교수가 2012년 학술지 '소비자 연구 저널(Journal of Consumer Research)'에 발표한 연구에 따르면, 사람들은 특정 집단의 정체성과 결부된 제품을 구매할 때 일반 구매보다 가격 저항이 현저히 낮아졌다. 같은 러닝화라도 '러너'라는 정체성과 연결된 브랜드일 때 소비자의 지불 의향이 평균 27% 높아졌다.


내가 러닝화를 사는 건 발을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는 러너다'라는 자기 선언에 가깝다. 비싼 장비일수록 그 선언이 더 강해지는 기분이 드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크루에서 찾는 소속감: 현대인의 '부족 심리'


러닝 크루 현상을 이해하려면 인간의 '부족 심리(tribal psychology)'를 먼저 살펴봐야 한다. 로빈 던바 영국 옥스퍼드대 실험심리학과 명예교수는 인간의 뇌가 안정적으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집단 규모를 약 150명으로 한정했다. 그보다 크거나 익명성이 강한 집단에서는 소속감보다 고립감이 커진다.


러닝 크루는 바로 이 '던바의 수' 안에 딱 들어맞는 공동체다. 보통 10명에서 50명 사이로 운영되는 크루는 서로 얼굴을 알고, 같은 목표를 공유하며, 함께 땀을 흘린다. 2022년 미국 심리학회(APA) 연구에서는 운동을 함께하는 집단 구성원 사이에 옥시토신 분비가 촉진되고, 신뢰 수준이 개인 운동 참여자보다 평균 34% 높게 나타났다.


도시에서 혼자 사는 사람이 늘고, 직장 밖에서 진짜 관계를 맺기 어려워진 시대에 러닝 크루는 일종의 현대판 부족이 됐다. 달리는 목적이 운동에서 연결로 바뀐 것이다.



고통을 선택하는 뇌: 엔도르핀 너머의 '러너스 하이'


달리기는 분명 힘들다. 숨이 차고, 다리가 무겁고,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반복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다음 날 또 신발을 찾는다. 이 역설적인 행동의 뒤에는 뇌의 보상 시스템이 있다. 오랫동안 '러너스 하이'의 원인으로 지목됐던 엔도르핀 외에, 최근 연구들은 엔도카나비노이드 시스템을 주목하고 있다.


요하네스 파이퍼 독일 하이델베르크대 신경과학과 교수팀이 2021년 발표한 연구에서는 30분 이상의 유산소 운동 후 혈중 엔도카나비노이드 농도가 유의미하게 상승했다. 이 물질은 뇌의 불안 반응을 억제하고 행복감을 유발하는데, 마리화나의 성분과 같은 수용체에 작용한다. 쉽게 말해 달리고 나면 뇌가 천연 진정제를 스스로 만들어내는 셈이다.


힘든 걸 알면서도 계속 달리게 되는 건 의지력이 아니라 뇌가 그 고통 이후의 쾌감을 이미 학습했기 때문이다. 한 번 그 감각을 맛본 뇌는 자꾸 그 경험을 반복하고 싶어한다.



달리기가 주는 심리적 통제감: 불안한 시대의 자기 효능감


경제적 불확실성, 관계의 단절, 미래에 대한 불안이 커진 시대에 달리기는 '내가 통제할 수 있는 무언가'를 제공한다. 오늘 5킬로미터를 뛰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달성하는 경험은 소소하지만 강력한 성취감을 준다. 앨버트 반두라 미국 스탠퍼드대 심리학과 교수가 제안한 '자기 효능감(self-efficacy)' 이론에 따르면, 작은 성공 경험을 반복할수록 더 어려운 도전에 맞서는 심리적 자원이 커진다.


2023년 국내 성인 1200명을 대상으로 진행된 서울대 체육교육과 연구팀의 조사에서는 주 3회 이상 러닝을 하는 그룹이 비운동 그룹보다 전반적인 삶의 통제감 점수가 21.3% 높게 나타났다. 흥미로운 점은 운동 강도보다 규칙성이 삶의 통제감에 더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빠르게 뛰는 것보다, 꾸준히 나가는 것 자체가 마음을 단단하게 만든다.


요즘처럼 많은 것이 내 의지와 무관하게 흘러가는 것처럼 느껴지는 시대일수록, 매일 아침 러닝화를 신고 나가 정해진 거리를 완주하는 행위는 단순한 운동이 아니라 '나는 내 삶을 꾸려가고 있다'는 심리적 선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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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6-06-12 08: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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