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부

[한국심리학신문=편집부 ]
"제가 책임지겠다." 고작 열세 살짜리 아이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최근 한 트로트 경연 프로그램에 출연한 13세 소녀가 가족의 생계를 자신이 책임지겠다고 선언해 화제가 됐다. 많은 시청자들이 그 당찬 모습에 감동받았지만, 심리학자들은 다른 신호를 읽는다.
아이가 어른의 역할을 짊어질 때, 겉으로는 성숙해 보여도 내면에서는 조용한 위기가 시작된다. 이른바 '어른 역할 아이', 심리학에서는 이를 '부모화(Parentification)'라고 부른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아이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무게를 등에 지고 있다.
부모화란 아이가 부모나 가족을 정서적·실질적으로 돌보는 역할을 맡게 되는 현상을 말한다. 그레고리 저렛 미국 캘리포니아주립대 심리학과 교수는 2011년 연구에서 부모화를 경험한 아동의 68%가 성인기에 만성적인 불안 증세를 보였다고 밝혔다. 가족을 '책임져야 한다'는 감각이 어린 신경계에 지속적인 긴장 상태를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부모화는 두 가지 형태로 나뉜다. 집안일이나 동생 돌보기처럼 실질적인 역할을 맡는 '도구적 부모화'와, 부모의 감정 쓰레기통이 되거나 가족 갈등을 중재하는 '정서적 부모화'다. 연예계 아역 스타들이 겪는 부모화는 두 가지가 동시에 일어나는 경우가 많다. 수입으로 가족을 부양하는 동시에, 가족의 희망이자 기대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아이들이 스스로를 '성숙하다'고 느낀다는 점이다. 칭찬과 감동의 반응이 반복되면 아이는 어른 역할이 자신의 정체성이라고 믿게 된다. 그리고 그 역할에서 벗어나는 것을 죄책감으로 느끼기 시작한다.
이번 보도에서 언급된 '쿠건법'은 미성년 연예인 수입의 15%를 신탁하도록 의무화한 미국 캘리포니아주 법이다. 할리우드 최초의 아역 스타 재키 쿠건이 영화로 벌어들인 수백만 달러를 부모가 모두 탕진한 사건에서 비롯됐다. 돈의 문제만이 아니다. 쿠건은 이후 오랜 기간 우울증과 정체성 혼란을 겪었다.
아역 연예인의 심리적 피해를 추적한 장기 연구도 있다. 게리 크레이머 영국 유니버시티칼리지런던 발달심리학과 연구팀은 2019년 아역 배우 출신 성인 214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이들의 51.8%가 성인기에 자아 정체성 혼란을 경험했다고 보고했다. '나는 연예인 역할을 하는 나인가, 아니면 진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성장기 내내 따라다닌다는 것이다.
한국 역시 예외가 아니다.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이 2023년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조기 입시·취업·연예 활동 등으로 이른 나이에 성인 역할을 수행한 청소년의 44.3%가 '나 자신을 위한 시간이 없다'는 감각을 호소했다. 스스로 원해서 시작한 일이라도 그 무게가 아이에게는 다르게 느껴진다.
시청자들이 어린 연예인의 '어른스러운' 발언에 감동받는 것은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하지만 루시 고다드 영국 옥스퍼드대 아동복지연구소 연구원은 2022년 논문에서 이를 '착취의 정서화'라고 명명했다. 아이의 고통이나 책임감을 '감동 서사'로 소비할 때, 사회는 그 구조를 문제 삼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특히 경쟁 프로그램에 출연한 아동은 심리적으로 더 취약하다. 매주 반복되는 탈락 공포, 시청자 평가에 노출되는 경험은 아이의 자존감 형성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수잔 파인스타인 미국 뉴욕대 아동임상심리학과 부교수는 경쟁형 방송에 참여한 6세에서 15세 아동을 추적 관찰한 결과, 참여 후 1년 시점에서 33.1%가 조건부 자존감, 즉 성과에 따라 자신의 가치가 달라진다는 감각을 내면화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조건부 자존감을 가진 아이는 잘할 때는 괜찮지만, 실패하는 순간 자신 전체가 무너지는 느낌을 받는다. 어른도 버거운 감각을 열세 살 아이가 감당하고 있는 셈이다.
부모화된 아이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역설적이게도 '아이로 있을 수 있는 허락'이다. 임상심리 전문가들은 어린 연예인 주변의 어른들이 아이의 수입이나 성과보다 아이가 오늘 무엇을 먹고 싶은지, 무엇이 무서운지를 먼저 물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가정 내에서도 마찬가지다. 아이가 '우리 가족 내가 책임질게'라고 말할 때, 그 말을 뿌듯하게 받아들이기 전에 한 번쯤 멈춰보자. '그 말이 네 진심이야, 아니면 네가 그렇게 해야 한다고 느끼는 거야?'라고 조용히 물어봐 주는 것만으로도 아이의 내면에는 안전한 공간이 열린다.
아이는 가족을 구하는 영웅이 아니라, 그냥 아이이기만 해도 충분하다. 오늘 내 주변에 너무 일찍 어른이 된 아이가 있다면, 그 아이에게 '잘 해줘서 고마워'보다 '그냥 있어도 괜찮아'라는 말을 먼저 건네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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