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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심리학신문=편집부 ]
경기 시작 전부터 심장이 빨라진다. 결과를 알 수 없는 90분 동안 숨을 참고, 골이 터지는 순간 전혀 모르는 옆 사람과 부둥켜안는다. 축구를 별로 좋아하지 않던 사람도 월드컵 기간만 되면 어느새 목이 쉬어 있다.
왜 우리는 이렇게 되는 걸까. 단순히 '재미있어서'라는 말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심리학자들은 이 현상 안에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욕구들이 촘촘히 얽혀 있다고 말한다.
그레고리 번스 미국 에모리대 신경과학과 교수는 뇌가 예측 가능한 보상보다 예측 불가능한 보상에 훨씬 강하게 반응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도파민 분비량이 결과가 확실할 때보다 결과가 불확실할 때 최대 4배까지 높아진다는 것이다. 축구 경기는 마지막 1초까지 결과를 알 수 없다. 뇌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도파민 파티인 셈이다.
이것이 각본 없는 드라마인 스포츠가 영화나 드라마보다 더 강렬한 감정을 유발하는 이유다. 결말을 이미 아는 콘텐츠와 달리, 실시간으로 펼쳐지는 경기는 뇌의 보상 회로를 끊임없이 자극한다. '혹시 이번엔?'이라는 기대감이 사라지지 않는 한 우리는 채널을 돌리지 못한다.
KBS 1TV '이슈 PICK 쌤과 함께' 285회에서 서울대학교 김기한 교수가 소개한 것처럼, 인간은 한계를 돌파하는 순간에 본능적으로 매료된다. 마라톤 2시간 벽이 무너지는 장면, 골키퍼 한 명이 팀을 구해내는 장면은 단순한 스포츠 기록이 아니라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의 경계'를 눈앞에서 확인하는 경험이다.
혼자 보는 것과 여럿이 함께 보는 것은 감정의 강도가 다르다. 엘리엇 애런슨 미국 UC 샌타크루즈 사회심리학과 명예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같은 자극이라도 집단 속에서 경험할 때 개인이 느끼는 감정의 강도가 평균 38% 높아진다. 이를 '감정 전염(emotional contagion)' 현상이라고 부른다. 옆 사람이 환호하면 나도 더 흥분되고, 옆 사람이 탄식하면 나도 더 절망스러워지는 것이다.
이 현상은 온라인 공간에서도 동일하게 작동한다. 거리 응원이 줄었다고 해서 집단 감정이 사라진 게 아니다. SNS 타임라인에 실시간으로 쏟아지는 반응들이 거실을 광장으로 바꿔놓는다. 나 혼자 소파에 앉아 있어도, 수백만 명이 동시에 같은 장면을 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감정은 증폭된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공유된 현실(shared reality)'이라고 부른다. 같은 경험을 함께 했다는 인식은 타인과의 심리적 연결감을 강화하고, 소속감과 안도감을 동시에 제공한다. 월드컵이 끝난 뒤 낯선 사람과도 '어제 그 경기' 한마디로 대화가 시작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대한민국 대표팀이 골을 넣으면 우리는 '내가 이겼다'는 느낌을 받는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영광 반사(BIRGing, Basking In Reflected Glory)' 효과라고 부른다. 로버트 치알디니 미국 애리조나주립대 심리마케팅학과 명예교수가 1976년 미식축구 팬 연구에서 처음 제안한 개념이다. 팀이 이긴 날에는 '우리 팀이 이겼다'고 표현하고, 팀이 진 날에는 '걔네가 졌다'고 표현하는 경향이 통계적으로 유의미하게 나타났다.
자신을 팀과 동일시하면 팀의 승리가 곧 자신의 성취가 된다. 평소 일상에서 좀처럼 경험하기 어려운 '완벽한 승리'의 감각을 대리로 맛볼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월드컵이 유독 직장에서 지쳐 있는 사람들, 자존감이 낮아진 시기의 사람들에게 더 큰 위안이 되는 이유다.
물론 그 반대도 있다. 팀이 지면 나도 진 것 같은 좌절감이 밀려온다. 그럼에도 우리가 계속 보는 이유는, 인간이 결과보다 과정의 서사에 감동받도록 설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기든 지든, 전력을 다해 뛰는 사람의 모습 자체가 뇌의 거울 신경계를 자극해 감동을 만들어낸다.
스포츠 심리학자 마틴 로버츠 영국 에든버러대 스포츠심리학과 교수는 2019년 연구에서 관중이 가장 강렬한 감동을 느끼는 순간이 '역전'이 아니라 '포기하지 않음'임을 밝혔다. 1000명의 관중을 대상으로 한 이 연구에서, 응답자의 72.4%가 '절대적 열세에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플레이'를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으로 꼽았다.
우리가 마흔 살 골키퍼의 선방에 열광하고, 후반 추가시간 동점골에 눈물을 흘리는 것은 그 장면이 단순한 경기 결과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할 수 없을 것 같아도 해봐야 한다'는, 우리가 일상에서 가장 듣고 싶은 메시지를 눈앞에서 증명하는 순간이다.
그래서 월드컵은 끝나도 남는다. 경기 결과는 잊혀도, 그 순간 느꼈던 감정의 질감은 오래 기억된다. 오늘 경기를 보며 심장이 두근거렸다면, 그건 단지 축구 때문이 아니다. 인간으로서 함께 느끼고, 함께 희망했던 경험이 당신 안에 새겨지고 있는 것이다. 오늘 경기가 끝난 뒤 가족이나 친구에게 '오늘 같이 봤으면 좋았을 텐데'라고 문자 한 통 보내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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