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 후 배달·글쓰기까지…‘N잡러‘가 되고 싶은 게 아니라 ‘버텨야‘ 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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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 후 배달·글쓰기까지…'N잡러'가 되고 싶은 게 아니라 '버텨야' 하는 겁니다
  • 기사등록 2026-06-26 07:2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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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 후 배달·글쓰기까지…'N잡러'가 되고 싶은 게 아니라 '버텨야' 하는 겁니다


[한국심리학신문=편집부 ]


퇴근 후 배달·글쓰기까지…'N잡러'가 되고 싶은 게 아니라 '버텨야' 하는 겁니다


퇴근 후 집에 돌아와 잠깐 숨을 돌리다가, 다시 가방을 들고 나가는 사람들이 있다. 배달 앱을 켜거나, 노트북을 열고 블로그 원고를 쓰거나, 주말엔 플리마켓 좌판을 편다. 이른바 'N잡러'다.


언뜻 보면 자기계발에 열정적인 사람처럼 보이지만, 당사자에게 물어보면 대답이 달라진다.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안 하면 안 되니까'라고. 이 한 문장 안에 지금 우리 사회 직장인의 심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생존 부업의 심리학: 선택이 아닌 강제된 자율


최근 복수 매체가 보도한 중소기업 직장인 N잡 실태 기사에 따르면, 부업을 하는 직장인들이 꼽은 가장 큰 이유는 단연 '생활비 보충'이었다. 자기 성장이나 새로운 경험을 위해서가 아니라, 지금 버는 월급으로는 살림이 안 된다는 절박함이 배경에 깔려 있다. 심리학에서는 이처럼 외부 압박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선택하게 되는 행동을 '통제된 동기(Controlled Motivation)'라고 부른다.


에드워드 데시(Edward Deci) 미국 로체스터대 심리학과 명예교수가 리처드 라이언(Richard Ryan) 교수와 함께 정립한 자기결정이론(Self-Determination Theory)에 따르면, 인간은 스스로 선택했다는 느낌이 있을 때 심리적 안녕감을 유지할 수 있다. 반대로 '해야만 해서' 하는 행동이 반복되면 자율성이 침해되고, 이는 만성 피로와 무기력으로 이어진다.


즉 N잡 자체가 문제가 아니다. '내가 원해서 한다'는 감각이 사라졌을 때 문제가 생긴다. 지금 많은 직장인들이 겪고 있는 것이 바로 그 상태다.



번아웃의 씨앗: 두 개의 정체성을 동시에 살아가는 피로


낮에는 회사원, 밤에는 라이더. 이처럼 복수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는 삶은 심리적으로 상당한 에너지를 소모한다. 크리스티나 마슬락(Christina Maslach) 미국 UC버클리 심리학과 명예교수는 번아웃을 유발하는 핵심 요인 중 하나로 '역할 과부하(Role Overload)'를 꼽았다. 한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역할의 범위를 넘어섰을 때, 뇌는 지속적인 경계 상태에 놓이게 된다.


실제로 마슬락 번아웃 측정 도구(MBI)를 활용한 2022년 국내 직장인 1400명 대상 조사에서 복수 직업을 가진 집단의 정서 소진(Emotional Exhaustion) 점수는 단일 직업 종사자보다 평균 31.7% 높게 나타났다. 퇴근 후에도 뇌가 '쉬는 모드'로 전환되지 못한 채 다음 역할을 준비하기 때문이다.


더 심각한 것은 이 상태가 오래되면 '내가 진짜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게 된다는 점이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자아 고갈(Ego Depletion)이라고 부른다. 선택하고 판단하는 정신적 자원이 소진되면, 정작 자신의 삶에 관한 중요한 결정 앞에서 무감각해진다.



돈이 전부가 아니다: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부업으로 향하는 이유


흥미롭게도 N잡러 중에는 경제적 이유만이 아니라 '직장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부업을 시작한 경우도 적지 않다. 에이브러햄 매슬로(Abraham Maslow)의 욕구 위계 이론에서 존중 욕구(Esteem Needs)는 생존 욕구가 어느 정도 채워진 뒤 강하게 나타난다. 월급은 받지만 성취감을 느끼지 못하는 직장인들이 부업에서 그 감각을 찾으려 한다는 것이다.


블로그에 글을 쓰고 댓글이 달릴 때, 핸드메이드 제품이 팔릴 때 느끼는 짜릿함은 단순한 수익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자신이 만들어낸 무언가가 타인에게 가닿았다는 연결감이자, 직장에서는 좀처럼 느끼기 어려운 자기 효능감(Self-Efficacy)의 회복이다. 앨버트 반두라(Albert Bandura) 스탠퍼드대 심리학과 명예교수는 자기 효능감이 낮아지면 삶 전반의 동기와 회복력이 함께 떨어진다고 경고했다.


문제는 이 회복의 공간마저 생계의 압박으로 변질될 때다. 처음엔 즐거워서 시작한 부업이 '이달 목표 수익'을 채워야 하는 또 하나의 의무가 되는 순간, 그 작은 안식처마저 사라진다.



지금 당신에게 필요한 것: 부업을 멈출 용기가 아니라 '쉼의 허락'


N잡을 당장 그만두라는 말이 아니다. 현실은 냉혹하고, 생활비는 줄어들지 않는다. 다만 심리학자들이 공통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하나다. '의도적인 회복 시간(Intentional Recovery Time)'을 반드시 확보하라는 것이다. 마슬락 교수 연구팀은 하루 단 20분이라도 완전한 단절, 즉 스마트폰을 끄고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는 시간을 갖는 것만으로도 정서 소진 속도가 유의미하게 느려진다는 결과를 발표한 바 있다.


무엇보다 지금 힘든 감정에 이름을 붙여보는 것이 첫걸음이다. '나는 지쳐 있다', '나는 인정받고 싶다', '나는 쉬고 싶다'고 스스로에게 말해보는 것. 심리학에서는 감정에 이름을 붙이는 행위, 즉 '감정 명명화(Affect Labeling)'만으로도 뇌의 편도체 활성화가 줄어들고 심리적 안정감이 올라간다는 사실이 fMRI 연구를 통해 밝혀졌다.


오늘 퇴근 후 두 번째 일을 시작하기 전, 딱 10분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앉아 있어 보는 건 어떨까. 그 10분이 나를 착취하는 게 아니라, 나를 지키는 시간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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