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는 게 미덕이던 세대, 참을수록 병드는 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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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심리학신문=강미소 kmsan0407@naver.com]

     * 생성형 AI를 사용한 이미지입니다.


감정을 잃어버린 사람들

최근 방영한 JTBC 드라마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에는 다소 인상적인 장면이 나온다. 바로 주인공들이 차고 있는 시계이다. 단순한 손목시계처럼 보이지만, 주인공들이 감정을 느낄 때마다 시계 화면에 지금 느끼고 있는 감정 단어를 보여주는 특이한 물건이다. 이 장면을 보면서 실제로 이런 시계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자신의 감정을 잘 느끼지 못하고 표현하지 못하는 현대인의 모습과 겹쳐 보였다. 심리학에서는 이렇게 자신의 감정을 인식하거나 언어로 표현하지 못하는 상태를 감정표현불능증(alexithymia)이라 부른다. 어쩌면 저 시계가 간절해 보였던 이유는, 우리 대부분이 이미 이 상태를 조금씩 느끼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현대인들의 감정표현불능증

감정표현불능이란 자신의 정서를 인식하고 언어로 표현하는 것의 어려움을 겪는 상태로, 병리적 수준에 이를 때 감정표현불능증이라고 부르고 있다. 감정표현불능 수준이 높은 사람은 단순히 감정을 잘 표현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정서 단어를 적게 사용하고 사용하는 어휘의 다양성도 떨어지는 문제를 보인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우울, 불안, 섭식장애 같은 심리 질환뿐 아니라 고혈압, 소화기관 장애 등 신체 질환과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감정표현불능증이 있는 사람은 스스로 자신의 어떤 감정이나 욕구를 느끼고 있는지조차 알아차리는 데 어려워하고, 몸에서 오는 감각과 감정을 서로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경험 자체가 낯설기 때문에 대화할 때도 정작 자기 이야기보다는 남 이야기를 하는 경우가 잦고, 이런 특성으로 인해 사람들과의 관계를 점점 피하게 되기도 한다.

 

특히 젊은 세대에서 감정을 인식하고 표현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사건이 자신에게 미친 내면적/정서적 영향을 생각하는 것은 피하고, 현실 기반적 사고와 사건의 표면적인 측면에만 초점을 두는 외부 지향적 사고(EOT)를 더 많이 하고 있다. 예를 들어 친한 친구와 싸웠을 때 ‘걔가 나한테 어떻게 그런 심한 말을 하지? 너무 억울하고 속상해, 화가 나서 울고 싶어.’라고 일반적인 정서적 중심의 반응을 보이지만 외부 지향적 사고를 할 때에는 “걔가 A에 대해서 말한 건 잘못되었고, 내가 이렇게 말한 건 좀 잘못했다. 그래도 걔가 먼저 원인을 제공했어.” 같이 자신이 느끼는 감정에 대해 생각하기보다 건조하고 객관적인 사실 위주로 파악하는 것이다. 권소영 등(2023)의 연구에 따르면 한국인 청년 집단과 중장년 집단을 대상으로 한국판 감정표현불능증 척도(TAS-20)를 사용해 분석한 결과, 청년 세대가 중장년 세대보다 감정을 알아차리고 타인에게 표현하는 것에 더 큰 어려움을 겪었다. 


한국 사회 특유의 감정 억제 문화

그렇다면 왜 우리 사회는 다른 곳보다 감정을 억제하는 것일까? 이를 사회문화적 관점으로 살펴보자면, 집단주의 문화권에 속해있는 동양인은 정서를 통제하고 사회적 관계와 집단의 조화를 강조하기 때문에 자신이 느낀 감정에 집중하기보다 겉으로 보이는 사회적 관계의 단서를 찾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 즉 집단주의 문화권과 외부 지향적 사고를 하고 있는 동양인은 개인주의 문화권에 있는 서양인보다 감정표현불능 수준이 높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더불어 한국처럼 전통적인 집단주의 문화에서는 상호 협조적 가치관을 따르고 있다(김해진 등, 2023). 이런 가치관을 가진 문화권에서는 집단의 화합을 중시하고 타인과의 관계 속 자신을 생각하기 때문에 직접적이고 공개적인 정서 표현을 거부하는 경향이 크다. 이 과정에서 사람들은 감정을 표현하고 싶으면서도 동시에 표현하면 안 될 것 같다는 망설임 사이에서 갈등하게 되는 정서 표현 양가성을 겪을 수 있다(김해진 등, 2023). 이런 경우 정서를 표현하고 나서 생길 결과에 대한 걱정으로 인해 궁극적으로 두려움에 정서를 억제하게 된다. 이러한 내적 갈등과 습관적인 정서 억제는 결국 자신의 감정을 점차 알아채기 어려운 감정표현불능증의 주요 원인이 될 수 있다.


자신의 감정에 이름 붙이지 못하는 청년들

권소영(2019) 연구에 따르면 한국인 대학생들의 감정 표현의 어려움은 집단주의적 가치관 때문이 아니라 개인주의적 가치관을 선호하지만, 개인의 독립적 자기관을 충분히 발달시키지 못한 탓이라고 주장하였다. 즉, 가치관은 개인주의로 옮겨갔지만, 그 가치관을 뒷받침할 자기 인식은 아직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이런 간극은 한국이라는 국가가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았을 때 자연스러운 결과이기도 하다. 한국도 중국, 일본처럼 집단주의 문화권에 속해있었다. 하지만, 짧은 시간 안에 경제 성장을 이루고 서구 사회와의 접촉이 활발해지면서, 한국인들의 사고방식에도 개인을 우선하는 가치관이 점차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오랜 세월 몸에 밴 감정 억제의 습관은 가치관의 변화만큼 빠르게 사라지지 않았다. 집단주의 문화권이었던 한국에서는 감정 표현을 자제하고 자신의 욕구나 주장을 참는 것이 바람직한 것으로 여겨져 왔다. 이런 한국 사회 특유의 감정 억제 문화는 1970년 이후 출생인 정보화 세대와 이전에 태어난 산업화 세대에 따라 그 효과와 부작용이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즉, 과거에는 감정을 억제하는 것이 미덕이었지만, 개인주의 가치관을 따르고 있는 청년층에게는 내면의 감정을 마비시키는 독이 되고 있다.

 

기성세대 (산업화 세대)는 정서 억제는 부정적인 행동으로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감정을 잘 다스릴수록 좋은 사람으로 여겨졌고, 그런 태도가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를 매끄럽게 만들어주었다. 즉, 감정을 억누르더라도 얻는 것도 있었던 셈이다. 그래서 기성세대에게는 정서를 억제하는 습관이 무조건 감정표현불능증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청년층 (정보화 세대)의 사정은 다르다. 자신의 감정과 선택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문화 속에서 자란 이들에게 윗세대의 방식대로 감정을 참고 집단에 충실하라는 요구는 자연스러운 미덕이 아니라 낯선 강요로 다가왔다. 원치 않은 억제가 계속될수록, 마음에는 불편함이 쌓여만 가고, 결국 자신이 지금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조차 알지 못하게 되는 감정표현불능 상태로 이어지기 쉽다.


번아웃으로 이어지는 연결 고리

1) 스트레스, 정서 억제와 감정표현불능증의 악순환

일상생활을 보내면서 경험한 부정적 사건들은 분노, 슬픔, 억울함, 속상함 등 부정 정서를 유발한다. 이때 정서를 제대로 표현하지 않고 꾹꾹 참는 습관은 결국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는 감정표현불능증으로 이어져 악화할 수 있다. 특히 우울증을 앓고 있는 사람은 분노 감정을 강하게 억제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렇게 억눌린 감정은 감정 표현에 어려움을 겪는 것과 동시에 신체화 증상에 영향을 미치는 핵심적인 원인이 될 수 있다. 개인이 느끼는 정서에서 오는 고통을 피하기 위한 나름의 대처 방안으로 감정을 억누르지만, 이런 정서를 억제하는 방법은 실제 정서 경험을 축소하거나 무마하지 못하고 오히려 마음속에 고스란히 쌓이게 된다. 이처럼 정서를 회피하는 방법은 일시적으로는 괜찮을 수 있지만, 정서의 재평가를 방해하는 부정적인 결과를 낳게 된다.

 

2) 마음의 고통을 몸의 고통으로 착각하는 오독 (誤讀)

이렇게 마음속에 쌓이게 된 고통이 감정표현불능증으로 이어져 사람들은 자신이 느낀 정서적 느낌과 신체적 감각과 구별하지 못하는 상태에 빠진다. 예를 들어 자신의 느끼고 있는 불안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심장이 과하게 뛰어서 그런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많은 현대인이 원인을 알 수 없는 두근거림이나 소화불량으로 병원에 가보지만, 아무런 의학적 이상이 없다는 진단을 받고는 한다. 이는 단순히 몸의 병이 아니다. 마음이 보내는 불안과 분노 같은 감정을 몸의 감각으로 착각해 잘못 오독한 결과일 수 있다. 자신의 감정에 스스로 이름을 붙이지 못할 때, 내면은 몸의 고통을 통해 말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처리하지 못한 내면의 고통은 갈 곳을 잃은 채 결국 의학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복통, 소화불량, 두통 등 신체화 증상으로 둔갑하여 나타난다. 만약 이런 증상이 지속되면 삶의 질이 감소하고 신체 증상 장애 같은 정신 질환으로 이어지기 쉽다.

 

3) 빠져나오기 힘든 뫼비우스의 띠

이는 결국 일상생활을 보내며 발생하는 스트레스나 부정 정서를 억제하면 스스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데 어려움을 겪게 된다. 그리고 이런 표현의 어려움은 신체화 증상으로 발현하기 쉽다. 실제로 신체화 증상을 겪는 사람들은 건강한 사람들보다 정서를 조절할 때 느끼고 있는 정서를 억누르는 방식을 습관적으로 과도하게 사용한다. 결국 뫼비우스의 띠처럼 계속해서 빠져나오기 힘든 고통을 되풀이하는 셈이다.


내 안에 억누르던 감정을 깨우는 마음 치유법 

1) 첫 번째, 자기연민 - “어떠한 판단, 평가 없이 내 감정을 받아들이기”

우선 자신의 감정을 대하는 태도부터 바꿔야 할 필요성이 있다. 바로 자기연민이다. 이는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자신을 비난하거나 채찍질하는 대신, 자신을 따뜻하고 관심 어린 이해로 공감하는 태도이다. 연구에 따르면 자기연민은 감정표현불능 수준을 낮춰 신체화 증상을 완화하는 데 큰 효과로 작용한다. 자기연민에 필요한 3가지 태도로는 비판이나 비난 대신 따뜻한 시선으로 대하는 자기 친절과 이런 고통이 나 혼자만 느끼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보편적 인간성, 마지막은 괴로운 감정을 회피하거나 과도하게 빠지지 않고 균형 잡힌 시각으로 관찰하는 것이다.

 

2) 두 번째, 표현적 글쓰기 방법 - “한 걸음 물러서서 내 감정에 이름 붙여보기”

이렇게 표현적 글쓰기를 통해 괴로운 감정을 억제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다. 표현적 글쓰기란 미국 사회심리학자 James W. Pennebaker가 제안한 방법으로 강한 스트레스나 부정 정서를 유발하는 사건에 관한 내용, 감정, 생각을 관찰해 자유롭게 작성하는 과정이다. 쉽게 자신이 느낀 감정이나 생각을 가감 없이 적는 것이다. 표현적 글쓰기는 자신의 내면을 더 명확하게 파악하고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으며 정서 억제로 인한 부정적 정서와 불안을 감소시킬 수 있다. 이때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감정의 소용돌이에만 빠져 오히려 고통을 곱씹는 반추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막기 위해서는 한 걸음 물러나 제삼자의 관점으로 자신을 바라봐야 한다. 구체적으로 글을 쓸 때 “나는 너무 불안하다.”라는 1인칭 표현보다 “홍길동은 지금 불안을 느끼고 있다.”를 사용하는 것이다. 이렇게 내적 경험과 자신을 분리하여 표현하는 타자화 방식으로 글을 쓰면 부정적인 감정을 자신과 동일시하지 않고 거리를 둠으로써 건강하게 감정을 받아들일 수 있다.

 

결국 번아웃과 정서 억제의 악순환을 끊는 열쇠는 이미 우리가 가지고 있다. 힘든 순간 스스로에게 다정해지는 자기연민을 연습하고, 한 걸음 물러나 내 감정을 제삼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글쓰기를 시작해 보는 것이다. 감정에 솔직하게 이름을 붙이는 그 작은 순간에서부터, 마음의 고통이 몸의 병으로 번지는 뫼비우스의 띠를 서서히 끊어낼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1) 김해진, 권소영, 정선호, 이동훈. (2023). 한국인의 문화적 자기관과 감정표현불능증의 관계: 세대에 의해 조절된 정서표현양가성 및 정서억제 연속매개과정 모형. 한국심리학회지: 문화 및 사회문제, 29(2), 171-197.

2) 김자경 and 황성훈. (2024). 부정생활사건, 감정표현불능증 및 신체화 증상의 관계에서 정서억제와 자기연민의 차별적 매개 효과. 한국심리학회지: 건강, 29(4), 623-639.

3) 엄현정, 김영근. (2021). 우울, 분노억제, 감정표현불능증 및 신체화의 구조적 관계. 상담학연구, 22(4), 105-128.
4) 이수진, 조성근. (2022). 자기 거리두기를 통한 표현적 글쓰기가 정서억제 전략을 사용하는 개인의 정서와 통증경험에 미치는 효과. 스트레스硏究, 30(3), 129-138.

5) 권소영, 노치현, 김해진, 이동훈, 조승빈. (2023). 한국판 감정표현불능증 척도(TAS-20K)를 이용한 청년과 중장년 세대 간 감정표현불능 수준의 비교. 한국심리학회지: 건강, 28(3), 601-622. http://dx-doi-org.libproxy.kornu.ac.kr/10.17315/kjhp.2023.28.3.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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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6-07-06 10:4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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