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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심리학신문=편집부 ]
스캔들이 터졌을 때 우리는 분명히 분노했다. 그런데 몇 년이 지나 그가 다시 카메라 앞에 서면, 어느새 박수를 보내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래도 연기는 잘하잖아'라는 말이 입에서 자연스럽게 나온다. 나만 이런 건 아닌가?
미국 연예매체 버라이어티에 따르면 배우 케빈 스페이시가 최근 팟캐스트 출연을 계기로 복귀 시동을 걸며 '이전보다 더 환영받고 있다'고 언급해 논란이 됐다. 성폭력 의혹이 제기된 지 9년이 지났다. 그런데 실제로 그를 향한 시선은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이 현상, 심리학적으로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사람의 뇌는 부정적인 감정 기억을 시간이 지날수록 희석시키는 경향이 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도덕적 기억 퇴색(Moral Fading)'이라고 부른다. 캐스린 워너 미국 노스웨스턴대 켈로그경영대학원 교수가 2014년 발표한 연구에 따르면, 사람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과거의 비윤리적 행동을 점점 덜 심각하게 평가하는 경향이 통계적으로 유의미하게 나타났다.
특히 상대가 유명인이거나 재능이 뛰어난 인물일수록 이 효과는 더 강하게 작동한다. 뇌는 그 사람이 제공했던 즐거움과 감동의 기억을 먼저 떠올리고, 불쾌한 사건의 기억은 뒤로 밀어버리는 것이다. '그래도 연기는 잘하잖아'라는 말이 무심코 나오는 건 나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뇌가 그렇게 작동하도록 설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심리가 개인의 내면에서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수백만 명의 대중이 동시에 같은 방향으로 기억을 퇴색시킬 때, 그것은 사회 전체의 용인으로 이어진다.
케빈 스페이시의 사례에서 두드러지는 또 다른 심리 기제는 '후광효과(Halo Effect)'다. 한 분야에서 탁월한 능력을 가진 사람에게는 다른 영역에서도 긍정적인 속성이 있을 것이라고 자동으로 판단하는 인지적 편향이다. 솔로몬 애시 미국 컬럼비아대 심리학과 교수가 처음 체계화한 이 개념은 이후 수십 년간 반복 검증됐다.
2018년 코넬대 연구팀이 성인 60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실험에서, 참가자들은 '사회적으로 물의를 빚은 유명 예술가'의 작품을 감상할 때 그 인물의 도덕적 문제를 이미 인지한 상태에서도 작품에 대한 평가를 의식적으로 분리하지 못하는 경향을 보였다. 특히 해당 예술가의 과거 작품에 깊이 몰입한 경험이 있을수록 이 분리 실패는 더 두드러졌다.
팬덤이 강력할수록 후광효과도 강해진다. '그 사람의 연기를 사랑했던 나'는 그 사람의 복귀를 환영하는 방향으로 스스로를 정당화하게 된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인지 일관성 유지' 욕구로 설명한다.
유명인의 스캔들 이후 복귀 과정에는 일정한 패턴이 있다. 침묵, 부분적 인정, 조용한 활동 재개, 그리고 '더 환영받고 있다'는 선언으로 이어지는 흐름이다. 이 서사 구조 자체가 대중의 심리적 허용을 유도하도록 설계되어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제니퍼 저커먼 미국 텍사스A&M대 심리학과 교수는 '공개적 복귀 서사는 대중에게 용서를 수행하게 만드는 일종의 사회적 각본'이라고 설명한다.
문제는 피해자 중심의 서사가 아니라 가해자 중심의 서사가 미디어를 통해 반복 소비된다는 점이다. '그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얼마나 오래 기다렸는지'에 초점이 맞춰질 때, 피해자의 경험은 자연스럽게 배경으로 밀려난다. 버라이어티가 보도한 팟캐스트 인터뷰에서도 진행자 빌 마허는 '한 사람의 주장이라면 나는 그 자리에 없었다'며 사실상 의혹을 희석하는 발언을 했다.
이처럼 미디어가 복귀 서사를 긍정적으로 프레이밍할 때, 대중은 별다른 저항 없이 그 흐름을 따르게 된다. 프레이밍 효과는 정보의 내용보다 정보가 제시되는 방식이 판단에 더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반복적으로 증명해 왔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심리학자들은 '예술과 예술가를 분리하는 것'이 완전히 가능한지에 대해 여전히 논쟁 중이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시간이 지났으니 괜찮다'는 감각이 뇌의 자동 반응에서 비롯된 것임을 인식하는 것만으로도 판단의 질이 달라진다는 점이다.
좋아했던 배우가 복귀 소식을 전했을 때 마음이 복잡하게 흔들린다면, 그것은 당신이 나쁜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다. 뇌가 즐거움의 기억과 불편한 진실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다는 신호다. 그 갈등을 무시하거나 한쪽으로만 밀어붙이는 대신, 잠깐 멈추고 '내가 지금 무엇을 정당화하려는 건지' 스스로에게 물어보는 것은 어떨까. 그 작은 질문 하나가, 대중의 기억이 집단적으로 퇴색되는 것을 조금은 늦출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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