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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심리학신문=편집부 ]
열심히 준비한 일이 완전히 실패로 돌아간 적이 있는가. 그 뒤로 한동안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던 경험, 한 번쯤은 있을 것이다. 하물며 그 실패가 전 세계 앞에서 공개적으로 일어난 것이라면 어떨까.
러시아 작곡가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는 1897년 교향곡 1번을 초연했다가 혹독한 혹평을 받았다. 이후 그는 3년간 단 한 음도 쓰지 못하는 상태에 빠졌다. 그런데 그를 다시 피아노 앞에 앉힌 것은 놀랍게도 '최면 치료'였다.
교향곡 1번의 초연은 처참했다. 지휘자가 취한 상태였다는 설도 있고, 당시 러시아 음악계의 거물이었던 체자르 퀴이는 '지옥의 음악학교에서 온 작품'이라고 혹평했다. 라흐마니노프는 이 사건 이후 극심한 자기 의심과 무기력에 빠졌고, 작곡이라는 행위 자체가 불가능해졌다.
심리학에서는 이 상태를 '수행 불안의 만성화'로 설명한다. 한 번의 실패 경험이 이후의 모든 시도를 위협으로 느끼게 만들어, 아예 시작조차 못 하게 되는 것이다. 미국 스탠퍼드대 심리학과 앨버트 반두라 교수가 제시한 '자기효능감(Self-Efficacy)' 이론에 따르면, 반복적인 실패 경험은 '나는 이것을 해낼 수 있다'는 믿음 자체를 무너뜨린다.
라흐마니노프의 경우는 단순한 슬럼프가 아니었다. 그는 공개적인 비난과 수치심이 결합된 트라우마를 경험했고, 이는 뇌의 편도체가 '작곡'이라는 행위 자체를 위험 신호로 학습하게 만들었다. 결국 창작은 기쁨이 아닌 공포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라흐마니노프를 구한 사람은 정신과 의사이자 최면 치료사였던 니콜라이 달 박사였다. 달 박사는 매일 그에게 최면을 걸며 같은 암시를 반복했다. '당신은 훌륭한 피아노 협주곡을 쓸 것이다. 그 작품은 정말 좋은 곡이 될 것이다.' 이 치료 이후 라흐마니노프가 완성한 곡이 바로 피아노 협주곡 2번이다. 지금도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클래식 작품 중 하나다.
최면 치료가 효과를 발휘하는 심리학적 이유는 명확하다. 에드워드 프리드먼 미국 앨버트 아인슈타인 의과대학 정신의학과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최면 상태에서는 전전두엽의 비판적 사고 기능이 일시적으로 억제되면서 긍정적 암시가 무의식에 더 깊이 각인된다. 비판적 자아가 잠시 물러서는 순간, 새로운 자기 서사가 뿌리를 내릴 수 있는 것이다.
최면이 만능은 아니다. 하지만 이 사례가 말해주는 본질은 따로 있다. 라흐마니노프에게 필요했던 것은 '더 열심히 연습하라'는 독려가 아니었다. 그는 무너진 자기 신뢰를 회복할 심리적 안전 공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라흐마니노프의 경험에서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공개적 실패'라는 조건이다. 혼자만 아는 실패와 다르게, 수많은 사람 앞에서 겪는 실패는 수치심이라는 감정을 동반한다. 브레네 브라운 미국 휴스턴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수치심을 '나는 나쁜 일을 한 게 아니라, 내가 나쁜 사람이라는 느낌'이라고 정의했다. 이 감각이 지속되면 사람은 자신을 드러내는 모든 행위를 회피하게 된다.
2014년 발표된 심리학 저널 '이모션(Emotion)'의 연구에서는 수치심을 경험한 피실험자 240명 중 68%가 이후 유사한 도전 상황에서 완전히 행동을 중단하는 반응을 보인 것으로 나타났다. 단순히 '기분이 나쁜' 수준이 아니라, 행동 자체를 멈추게 만드는 강력한 정서 반응이다.
라흐마니노프의 3년이 우리에게 낯설지 않은 이유가 여기 있다. 발표 수업에서 망신을 당한 뒤 손을 들지 않게 된 기억, 퇴짜 맞은 기획안 이후 새 아이디어를 꺼내지 못하는 경험. 규모만 다를 뿐, 우리는 모두 각자의 '교향곡 1번 초연'을 품고 살아간다.
심리학자들은 라흐마니노프식 회복의 핵심 요소로 '안전한 관계'와 '반복적 긍정 자기 암시'를 꼽는다. 달 박사의 최면은 결국 매일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서 '당신은 할 수 있다'는 믿음을 반복 주입하는 구조였다. 마틴 셀리그만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심리학과 교수가 창시한 긍정심리학에서도 '학습된 무기력'을 깨는 방법으로 작은 성공 경험의 반복을 강조한다. 거창한 도전이 아니어도 된다. 오늘 한 소절만 써보는 것, 그 작은 한 걸음이 뇌의 회로를 바꾸기 시작한다.
문득 오래 미뤄온 일이 떠오른다면, 혹시 그것이 실패의 기억과 연결되어 있지는 않은지 한번 들여다보자. 완벽하게 준비된 다음이 아니어도 좋다. 라흐마니노프도 처음엔 최면에 반신반의했다고 한다. 그래도 그는 매일 달 박사의 진료실 문을 열었다. 당신의 '달 박사'는 어쩌면 오늘 열어보는 빈 노트 한 권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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