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부

[한국심리학신문=편집부 ]
어렸을 때 운동을 배워본 사람이라면 한 번쯤 들어봤을 말이 있다. '이겨야 살아남는다.' 코치의 호각 소리와 함께 시작된 훈련은 기술을 가르치기 전에 먼저 '지면 안 된다'는 공포를 심었다. 그 공포가 아이의 마음 깊은 곳에 어떤 씨앗을 남겼는지는 아무도 묻지 않았다.
최근 배재고 야구부 사태와 고교 스포츠 현장의 잇따른 폭력·조롱 사건은 단순한 '교육 부재'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 심리학자들은 이 현상의 뿌리가 훨씬 더 깊고 구조적인 곳에 있다고 말한다. 승리 지상주의가 선수의 뇌와 도덕 판단 체계에 실제로 어떤 변화를 만들어내는지, 연구들은 이미 답을 내놓고 있다.
알버트 반두라 미국 스탠퍼드대 심리학과 명예교수가 제시한 '도덕적 이탈(moral disengagement)' 개념은 스포츠 폭력을 이해하는 핵심 열쇠다. 반두라는 사람이 평소에는 옳다고 믿는 가치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특정 환경에서는 그 가치를 스스로 꺼버리는 심리 기제가 작동한다고 설명했다. '어차피 다들 이렇게 훈련한다', '이 정도는 강해지려면 필요하다'는 식의 합리화가 바로 도덕적 이탈의 전형적인 신호다.
2019년 이탈리아 볼로냐대 스포츠심리학 연구팀이 청소년 운동선수 412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연구에 따르면, 승리를 가장 중요한 목표로 설정한 환경에서 훈련받은 선수들은 그렇지 않은 선수들보다 도덕적 이탈 점수가 평균 38.7% 높게 나타났다. 경쟁 압박이 높을수록 상대방의 고통에 무감각해지는 속도도 빨라졌다.
더 충격적인 것은 이 변화가 뇌 구조에도 흔적을 남긴다는 점이다. 캐나다 맥길대 신경과학과 연구팀은 만성적인 경쟁 스트레스에 노출된 청소년의 경우 공감과 사회적 판단을 담당하는 전두엽 피질의 활성화 수준이 또래보다 유의미하게 낮다는 사실을 fMRI 분석을 통해 확인했다. 이기는 훈련이 반복될수록 '남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뇌'가 조금씩 꺼지는 셈이다.
스포츠 팀은 강력한 내집단 의식을 형성한다. 함께 땀 흘리고 함께 이긴 동료에 대한 소속감은 그 자체로 나쁜 것이 아니다. 문제는 그 결속감이 '우리 팀 안에서 일어나는 일에는 눈을 감아야 한다'는 침묵의 규범으로 변질될 때 생긴다. 사회심리학에서는 이를 '집단 규범화(normalization of group norms)'라고 부른다.
필립 짐바르도 미국 스탠퍼드대 심리학과 명예교수는 선량한 사람도 특정 집단 역학 속에서 폭력에 가담하거나 방관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수십 년의 연구로 입증했다. 그가 강조한 '루시퍼 이펙트', 즉 환경이 사람을 변화시키는 힘은 스포츠 현장에서도 그대로 작동한다. '다들 하는데 나만 이상한 거 아닌가'라는 불안이 양심의 목소리를 눌러버린다.
2022년 한국스포츠정책과학원이 발표한 실태조사에서 고교 운동선수 1,247명 중 44.2%가 팀 내 폭력이나 괴롭힘 상황을 목격한 적 있다고 답했다. 그중 즉각적으로 제지했다고 응답한 비율은 11.3%에 불과했다. 대부분의 선수들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거나 '나서면 내가 다음 표적이 될 것 같았다'고 이유를 밝혔다.
어린 시절 스포츠 현장에서 받은 심리적 충격은 단순한 나쁜 기억이 아니다. 마틴 스미스 영국 레스터대 스포츠심리학과 부교수가 엘리트 출신 전직 선수 89명을 대상으로 한 심층 인터뷰 연구에서 63.2%가 코치로부터의 언어 폭력 또는 굴욕적 경험이 성인이 된 후에도 자기효능감과 대인 신뢰에 부정적 영향을 미쳤다고 응답했다. 코치의 말 한마디가 선수의 자아상에 수십 년 동안 각인되는 것이다.
더 주목해야 할 점은 폭력적인 방식으로 훈련받은 선수가 지도자가 됐을 때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세대 간 전수(intergenerational transmission)'라고 부른다. 자신이 배운 방식이 곧 정답이라고 내면화한 지도자는 무의식 중에 같은 패턴을 반복한다. '나도 이렇게 해서 여기까지 왔잖아'라는 생각이 폭력을 훈육으로 포장하는 자기합리화의 핵심 문장이 된다.
결국 운동장에서 벌어지는 폭력은 개인의 나쁜 성품이 아니라 구조가 만들어낸 결과다. 가르치는 사람도, 배우는 사람도,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도 모두 그 구조 안에서 함께 영향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희망적인 연구 결과도 있다. 캐나다 오타와대 스포츠심리학과 진 코테 교수 연구팀은 2021년 청소년 스포츠 팀 226개를 분석한 결과, '숙달 지향 동기 환경(mastery motivational climate)'을 적용한 팀에서 선수들의 공감 능력이 평균 29.4% 향상됐고, 팀 내 괴롭힘 발생 빈도는 51.8% 감소했다는 결과를 발표했다. 이기는 것이 아니라 '어제보다 나아지는 것'을 목표로 삼을 때 선수들의 심리 건강이 달라지는 것이다.
오늘 당장 운동장의 문화가 바뀌지는 않더라도, 내 아이가 다니는 팀의 코치가 선수에게 어떤 말을 자주 하는지 한 번쯤 귀를 기울여 보는 것은 어떨까. '잘 버텼네', '오늘 네가 한 선택이 좋았어'라는 말 한마디가 아이의 뇌에 어떤 씨앗을 심는지, 이제 우리는 알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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