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부

[한국심리학신문=편집부 ]
열심히 준비했다. 자격증도 땄고, 인턴도 했고, 포트폴리오도 다듬었다. 그런데 지원서를 넣고 또 넣어도 답장이 없다. '내가 부족한 건가' 싶다가도,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혹시 나 자리 자체가 없어진 건 아닐까?'
그 불안이 근거 없는 게 아니었다. 동아일보가 최근 보도한 단독 기사에 따르면 국내 주요 IT 기업들의 20대 신규 채용이 최근 3년 사이 43%나 감소했다. AI가 신입 사원의 역할을 대체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취업을 준비하는 20대 입장에선 단순히 '취업난'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 자체가 시장에서 필요 없어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심리학은 이 감각에 이름을 붙인다.
단순히 경쟁에서 밀리는 것과, 자신이 아예 필요 없다는 메시지를 받는 것은 심리적으로 전혀 다른 충격을 준다. 제프 그린버그 미국 애리조나대 심리학과 교수가 제안한 '공포 관리 이론(Terror Management Theory)'에 따르면, 인간은 자신의 존재가 무의미하거나 대체 가능하다는 신호를 받을 때 심층적인 불안 반응을 일으킨다. 이는 단순한 취업 스트레스가 아니라, 자아의 가치와 생존 의미에 대한 위협으로 뇌가 처리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2023년 미국심리학회(APA)가 성인 3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 AI 및 자동화로 인한 일자리 위협을 인식한 집단은 그렇지 않은 집단보다 만성 불안 수준이 27% 높았고, 자존감 점수는 평균 19% 낮게 측정됐다. 위협의 원인이 '나의 능력 부족'이 아니라 '구조적 대체'일 때, 인간은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없다는 무력감을 더 강하게 느끼게 된다.
국내 게임사에서 20년 넘게 근무한 한 직원은 동아일보 인터뷰에서 '과거에는 100명이 게임 하나를 만드는 데 3년이 걸렸지만, AI 전환으로 같은 작업을 10명이 할 수 있게 됐다'고 밝혔다. 이 말은 생산성 향상의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취업 준비 중인 20대에게는 '90명의 자리가 사라졌다'는 메시지로 들린다.
반복되는 실패와 구조적 배제는 마틴 셀리그만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심리학과 교수가 제안한 '학습된 무력감(Learned Helplessness)' 상태를 만들어낸다. 셀리그만 교수의 고전 연구에서 통제 불가능한 환경에 반복 노출된 집단은 이후 탈출 가능한 상황에서도 시도조차 하지 않는 패턴을 보였다. 취업 시장에서 수십 번의 탈락을 경험한 청년이 '어차피 안 된다'며 지원 자체를 포기하는 것은 의지 부족이 아니라, 뇌가 학습한 회피 반응일 수 있다.
이 상태가 위험한 이유는 단순히 취업을 못 하는 데서 그치지 않기 때문이다. 학습된 무력감이 지속되면 우울증으로 이어질 위험이 높고, 자기효능감 전반이 무너지면서 인간관계나 일상 활동에서도 의욕을 잃는 '무기력 전이' 현상이 나타난다. 2024년 한국고용정보원 조사에서 취업 단념 청년 중 61.4%가 '다시 도전할 자신이 없다'고 응답한 것은 이 심리적 기제와 무관하지 않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 세대가 불안을 드러내기 어려운 환경에 놓여 있다는 점이다. SNS에서는 또래가 취업에 성공했다는 소식이 넘쳐난다. 자신만 뒤처지는 것 같다는 '사회비교 편향'이 자존감을 더 빠르게 무너뜨린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상향 비교(Upward Social Comparison)'라고 부르는데, 비교 대상이 많을수록, 그리고 비교가 공개될수록 자기비난이 심해지는 경향이 있다.
취업 실패가 반복될 때 많은 청년이 겪는 또 하나의 심리적 위기는 정체성 혼란이다. 에릭 에릭슨의 심리사회 발달 이론에 따르면 20대는 자아 정체성을 확립해야 하는 핵심 시기다. 직업과 역할은 단순히 돈을 버는 수단이 아니라, '나는 어떤 사람인가'를 정의하는 중요한 요소다. AI가 신입 사원의 역할을 대체할 수 있다는 사회적 메시지는, 아직 정체성을 다 형성하지 못한 20대에게 '내가 사회에서 기여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신호로 작동할 수 있다.
하지현 건국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저서에서 청년기의 반복된 사회적 배제 경험이 자아 개념 형성에 구조적 손상을 입힐 수 있다고 강조한다. 특히 실패의 원인이 개인의 노력이나 능력이 아니라 외부 구조에 있을 때, 젊은이들은 이를 내면화해 '나라는 존재 자체가 문제'라는 왜곡된 자기 인식을 갖게 될 위험이 있다.
그렇다면 이 상황에서 심리적으로 버틸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연구자들은 '통제 가능한 영역에 집중하기'를 공통적으로 권고한다. 앨버트 반두라 스탠퍼드대 심리학과 교수의 자기효능감 이론에 따르면, 작은 성공 경험이 쌓일수록 무력감에서 회복하는 속도가 빨라진다. 구직 활동 전체를 하나의 거대한 목표로 삼기보다, 오늘 이력서 한 줄을 다듬거나 새로운 기술을 30분 배우는 것처럼 당장 완수할 수 있는 작은 과제를 만드는 것이 심리적 회복의 출발점이 된다.
AI 전환이라는 구조적 변화 앞에서, 20대 청년 개인이 느끼는 불안과 무력감은 결코 나약함의 증거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전례 없는 변화에 뇌가 보내는 정상적인 경보 신호다. 문제는 이 불안을 혼자 삼키거나, SNS 속 타인의 성공과 비교하며 자책하는 방향으로 처리할 때 심리적 손상이 깊어진다는 점이다.
심리학자들은 불안을 줄이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 중 하나로 '감정의 언어화'를 꼽는다. 막연하게 불안한 것을 그냥 두는 대신, '나는 지금 대체당하는 것이 두렵다'고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것만으로도 편도체 반응이 줄어든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가까운 친구에게, 혹은 상담사에게, 아니면 일기장에라도 지금 느끼는 두려움을 글로 써보는 건 어떨까. 말로 꺼내는 순간, 그 불안은 조금 작아지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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