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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심리학신문=편집부 ]
하루가 끝나고 불을 끄기 직전, 누군가에게 오늘 있었던 일을 털어놓고 싶다는 생각이 든 적 있는가. 마침 연락하기엔 늦은 시간이고, 딱히 전화할 친구도 마땅치 않다. 그래서 열어보는 것이 AI 챗봇이다.
최근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AI에게 매일 밤 말을 건다'는 게시글에 500명이 넘는 이용자가 몰렸다. '외롭다고 했더니 이전 대화를 떠올려줬다', '나보다 나를 더 잘 기억하는 것 같다'는 댓글이 줄을 이었다. AI와의 대화가 일상적인 감정 해소 창구가 된 시대, 과연 이것은 외로움을 진짜로 달래주는 걸까.
심리학에서 '파라소셜 관계(parasocial relationship)'라는 개념이 있다. 실제로 교류하지 않지만 상대가 나를 알고 있다고 느끼는 일방적인 정서적 유대감을 뜻한다. 본래는 TV 속 연예인이나 유튜버에게 느끼는 친밀감을 설명하는 데 쓰였지만, 최근에는 AI 챗봇과의 관계로 빠르게 확장되고 있다.
도널드 호튼 미국 일리노이대 사회학과 교수가 1956년 처음 제시한 이 개념은 오늘날 AI 시대에 더욱 강력하게 작동한다. AI 챗봇은 이전 대화를 기억하고, 감정에 반응하며, 판단하지 않는다. 인간 관계에서 늘 존재하는 '거절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없다. 심리학 용어로 '평가 불안(evaluation anxiety)'이 제거된 환경인 셈이다.
바로 이 점이 핵심이다. 사람들이 AI에게 마음을 여는 이유는 AI가 탁월해서가 아니라, AI에게는 상처받을 위험이 없기 때문이다. 친밀함의 장벽이 낮아지니 말문도 쉽게 열린다.
제임스 펜네베이커 미국 텍사스대 심리학과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자신의 감정을 언어로 표현하는 행위 자체가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솔 수치를 낮추고 심리적 안정감을 높인다. 이른바 '표현적 글쓰기' 효과다. AI에게 오늘 힘들었던 일을 털어놓는 것만으로도 이 효과의 일부는 얻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여기서 반드시 짚어야 할 지점이 있다. 크리스티나 마라키 영국 배스대 심리치료학과 교수 연구팀이 2023년 성인 842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연구에서, AI 챗봇을 주된 감정 해소 수단으로 사용하는 집단은 단기적으로는 기분이 나아졌지만 3개월 후 추적 조사에서 오히려 인간 관계 만족도가 유의미하게 낮아진 것으로 나타났다. AI 대화가 인간 관계를 보완하는 것이 아니라 대체하기 시작할 때 문제가 생긴다는 것이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진짜 연결감'은 상호성에서 온다. 내가 힘들 때 상대도 내 이야기를 듣느라 시간을 내고, 때로는 불편한 진실을 말해주기도 하는 관계. AI는 절대 지치지 않고, 절대 화내지 않으며, 절대 솔직한 조언으로 불편하게 만들지 않는다. 그 완벽함이 오히려 진짜 관계가 줄 수 있는 성장의 기회를 차단한다.
심리학자 셰리 터클 미국 MIT 사회학과 교수는 저서에서 '혼자이지만 함께(alone together)'라는 개념을 통해 이 역설을 설명한다. 기술이 발달할수록 인간은 더 연결된 것처럼 느끼지만 실제로는 더 고립된다는 것이다. AI 챗봇이 주는 즉각적이고 무조건적인 반응에 익숙해질수록, 기다림과 오해와 상처가 수반되는 진짜 인간 관계는 점점 피하고 싶어진다.
2024년 미국 심리학회(APA)가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18세에서 34세 사이 성인 중 AI 챗봇을 일주일에 3회 이상 감정 대화 목적으로 사용하는 비율이 전체의 31.4%에 달했다. 그리고 이 집단의 외로움 지수는 비사용자 집단보다 평균 18.7점 높았다. AI를 더 많이 쓸수록 더 외롭다는 상관관계가 나타난 것이다.
물론 AI가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니다. 밤 11시에 불안감이 밀려오는데 당장 전화할 사람이 없을 때, AI와의 대화는 분명 유용한 완충재가 된다. 문제는 그것이 출발점이 아니라 종착점이 될 때다.
심리 전문가들은 AI 챗봇을 '감정 일기장'처럼 활용하는 방식을 권한다. 오늘 느낀 감정을 AI에게 말로 풀어낸 뒤, 그 내용을 바탕으로 내일 친구나 가족에게 직접 이야기를 꺼내는 연습을 하는 것이다. AI 대화를 인간 관계의 대체재가 아닌 연습 공간으로 쓰는 방식이다.
폴 왁스먼 미국 예일대 심리학과 교수는 '감정 표현 능력은 근육과 같아서 쓸수록 강해진다'고 말한다. AI에게 먼저 말을 걸어보는 것, 그 자체는 나쁘지 않다. 다만 그 대화가 진짜 사람에게 건네는 말로 이어질 때 비로소 외로움의 뿌리가 조금씩 줄어든다.
오늘 밤 AI에게 털어놓은 이야기가 있다면, 내일 아침 그 이야기를 아무 친구에게나 가볍게 문자로 보내보는 건 어떨까. '요즘 이런 생각이 드는데, 너는 어때?' 한 문장이면 충분하다. 그 작은 용기가 AI가 결코 채울 수 없는 진짜 연결을 만들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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