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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심리학신문=편집부 ]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하는 것만큼 충격적인 경험은 없다. 낯선 사람에게 사기를 당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가장 가까이에서, 가장 많은 걸 알고 있던 사람이 내 뒤통수를 치는 순간, 뇌는 그 충격을 감당하지 못해 말 그대로 멈춰버린다.
메이저리그 스타 오타니 쇼헤이의 전 통역사 이페이 미즈하라가 주인의 계좌에서 수십억 원을 빼내 불법 도박에 탕진한 사건은 단순한 금융 범죄가 아니다. 심리학자들은 이 사건을 두고 '친밀한 배신'의 전형적인 패턴이라고 입을 모은다. 도대체 가장 가까운 사람은 왜, 어떻게 배신자가 되는 걸까.
제니퍼 프라이드 미국 오리건대 심리학과 명예교수는 1994년 처음 제안한 '배신 트라우마 이론'에서 신뢰 관계가 깊을수록 배신의 심리적 충격은 기하급수적으로 커진다고 밝혔다. 프라이드 교수가 성인 85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연구에서, 친밀한 관계에서 발생한 배신을 경험한 집단은 낯선 사람에 의한 피해 집단보다 외상 후 스트레스 증상 발현율이 3.2배 높았다.
오타니와 미즈하라의 관계는 단순한 고용주와 직원의 관계가 아니었다. 미즈하라는 통역을 넘어 오타니의 일상 전반을 관리하는 실질적인 조력자였다. 심리학에서는 이처럼 상대의 약점과 내밀한 정보에 깊이 접근한 사람이 그 신뢰를 무기로 삼을 때를 '근접 배신'이라고 부른다.
가장 가까이 있던 사람에게 배신당한 피해자는 현실 자체를 의심하기 시작한다. '내가 사람을 보는 눈이 없었나', '그간의 모든 친절이 다 가짜였나' 하는 반추가 시작되는 것이다. 이는 자아감을 뒤흔드는 경험으로, 단순한 금전적 손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심리적 상처를 남긴다.
그렇다면 배신자의 내면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걸까. 로버트 펠드먼 미국 매사추세츠대 심리학과 교수는 2023년 연구에서 대부분의 배신 행위가 처음부터 계획된 것이 아니라 '미끄러운 경사면 효과'를 통해 점진적으로 심화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처음에는 사소한 규칙 위반에서 시작해, 그게 용납되면 조금 더 큰 위반으로 넘어가는 패턴이다.
미즈하라의 경우도 처음부터 수십억 원을 빼낼 계획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다. 도박 빚이 쌓이면서 '이번 한 번만'이라는 자기 합리화가 반복되고, 뇌의 도파민 보상 시스템이 오작동하면서 판단력이 마비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배신자는 스스로를 피해자로 재구성하기도 한다. '나는 어쩔 수 없었다', '이 정도 도움은 받을 자격이 있다'는 식으로.
펠드먼 교수는 이를 '도덕적 이탈'이라고 설명한다. 자신의 행동이 나쁘다는 것을 알면서도 뇌가 그 인식 자체를 차단하는 심리적 방어 기제다. 도박 중독이 동반될 경우 이 기제는 훨씬 강하게 작동한다는 점에서, 미즈하라 사건은 배신과 중독이 맞물린 복합적인 심리 사례로 볼 수 있다.
이 사건에서 특히 주목할 부분은 미즈하라가 오타니의 목소리까지 위조해 금융기관에 연락했다는 의혹이다. 이는 단순한 사기를 넘어, 상대를 완전히 통제하려는 심리적 전략의 일환으로 읽힌다. 폴 에크만 미국 캘리포니아대 샌프란시스코 캠퍼스 심리학과 명예교수는 가까운 관계에서의 기만이 오래 지속될수록 배신자는 상대의 반응 패턴을 너무 잘 알아 감지 자체가 어렵다고 설명한다.
우리는 흔히 '사람 보는 눈'이 없었다며 피해자를 탓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심리학적으로 볼 때, 친밀한 관계에서 기만을 탐지하는 것은 구조적으로 매우 어렵다. 2022년 영국 포츠머스대 알다트 브린케 교수팀의 연구에서 사람들이 낯선 사람의 거짓말 탐지율은 54%에 불과한데, 가까운 관계에서는 오히려 43%로 더 낮아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친밀할수록 상대를 믿으려는 본능이 의심보다 앞서기 때문이다.
결국 이 사건이 '소름 끼친다'는 반응을 이끌어내는 이유는, 우리 모두가 어딘가에서 누군가를 깊이 신뢰하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 신뢰가 언제든 무기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은 불안을 자극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관계를 의심하며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배신 이후의 심리적 회복에 관해 가장 많이 인용되는 연구자는 줄리앤 엥겔 미국 플로리다주립대 임상심리학과 교수다. 엥겔 교수는 2021년 배신 경험자 620명을 3년간 추적한 연구에서, 빠르게 회복한 집단의 공통점으로 두 가지를 꼽았다. 자신이 피해자임을 명확히 인식하는 것, 그리고 배신자의 행동을 자신의 문제로 내면화하지 않는 것이었다.
오타니 역시 공식 성명에서 자신이 사건의 피해자임을 분명히 밝혔다. 심리학적으로 이 태도는 매우 건강한 반응이다. '내가 잘못 뽑은 것'이 아니라, 상대가 잘못된 선택을 한 것임을 인정하는 것이 회복의 출발점이다.
혹시 나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면,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해주는 것부터 시작해보자. '믿었던 내가 잘못된 게 아니라, 그 믿음을 이용한 상대가 잘못한 것이다'라고. 신뢰할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당신의 따뜻함이지, 결코 약점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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