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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심리학신문=편집부 ]
민원 창구 앞에 앉은 공무원 A 씨는 요즘 출근길이 두렵다. 민원인이 스마트폰을 들이밀며 "제미나이가 이렇게 답했는데, 당신은 왜 이렇게 처리하냐"고 따지는 일이 잦아졌기 때문이다. AI가 내놓은 답변을 '정답'처럼 들고 오는 민원인 앞에서, A 씨는 제대로 설명도 못한 채 고개를 숙인다.
동아일보 보도에 따르면 최근 공공기관 민원 현장에서 챗GPT나 구글 제미나이 등 AI 챗봇의 답변을 근거로 담당 공무원의 판단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례가 급증하고 있다. 문제는 AI가 틀린 경우도 많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민원인은 물러서지 않는다. 대체 왜 그럴까.
로버트 치알디니 미국 애리조나주립대 심리학과 명예교수는 사람들이 불확실한 상황에서 '권위 있는 출처'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다고 설명한다. 과거에는 그 권위가 전문가나 공식 기관이었다면, 이제는 AI가 그 자리를 빠르게 대체하고 있다. AI의 답변이 유창하고 자신감 넘치는 어조로 제시될수록 사람들은 그것을 더욱 사실로 받아들인다.
여기에 '자동화 편향(Automation Bias)'이 더해진다. 자동화 편향이란 인간의 판단보다 자동화된 시스템의 결과를 더 신뢰하는 심리적 경향이다. 린다 로텐버그 예일대 심리학과 연구팀이 2022년 성인 85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실험에서, 응답자의 61.3%가 사람의 조언보다 AI의 조언을 더 신뢰한다고 답했다. 기계는 감정이 없으니 편향도 없을 것이라는 믿음이 깔려 있는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AI는 자주 틀린다. 법령 해석이나 행정 절차처럼 맥락이 복잡한 영역에서 AI 챗봇은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부정확한 정보를 내놓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럼에도 민원인이 물러서지 않는 건 또 다른 심리 기제, 바로 '확증 편향' 때문이다. 자신이 원하는 결론을 이미 마음속에 정해두고, AI의 답변이 그것과 일치하면 무조건 옳다고 믿어버리는 것이다.
민원 공무원들이 겪는 심리적 피로는 단순한 스트레스가 아니다. 앨리 혹실드 미국 UC버클리 사회학과 명예교수가 처음 제시한 '감정 노동(Emotional Labor)' 개념은 자신의 실제 감정을 숨기고 직업적으로 요구되는 감정을 지속적으로 연기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소진을 설명한다. 공무원들은 민원인이 틀린 AI 정보를 들고 와도 정면으로 반박하기 어렵다. '공무원이 AI보다 모른다'는 인식이 퍼질까 두렵고, 감정적으로 격앙된 민원인과 충돌하는 상황도 피하고 싶기 때문이다.
이 과정이 반복될수록 공무원들은 '직무 무력감'에 빠진다. 마틴 셀리그만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심리학과 교수의 '학습된 무력감(Learned Helplessness)' 이론에 따르면, 자신의 행동이 상황을 바꾸지 못한다는 경험이 쌓이면 사람은 아예 시도 자체를 포기하게 된다. AI를 무기로 든 민원인 앞에서 매번 설명하다 무시당하는 경험이 반복되면, 공무원은 점점 소극적으로 변해간다.
한국행정연구원이 2024년 발표한 공무원 감정 노동 실태 조사에 따르면, 민원 담당 공무원의 74.2%가 악성 민원으로 인한 심리적 소진을 경험했다고 응답했다. AI 활용 민원이 본격화된 것은 최근의 일이지만, 이 수치는 앞으로 더욱 올라갈 가능성이 크다.
AI를 들고 오는 민원인들이 모두 나쁜 의도를 가진 것은 아니다. 심리학자들은 이 현상의 뿌리에 '통제감 상실에 대한 불안'이 있다고 본다. 복잡한 행정 절차 앞에서 자신이 불리한 위치에 있다고 느낄 때, 사람들은 균형을 되찾기 위해 무언가 강력한 근거를 찾는다. AI는 그 도구가 된다. 내가 직접 조사했고, 전문적인 시스템이 내 편이라는 확신은 불안을 잠시 눌러준다.
레온 페스팅거 스탠퍼드대 심리학과 교수가 제시한 '인지 부조화(Cognitive Dissonance)' 이론도 여기서 작동한다. AI가 틀렸다는 사실을 마주하면 자신이 틀렸다는 현실도 함께 인정해야 하기 때문에, 민원인은 공무원의 설명을 받아들이기보다 AI의 답변을 더욱 강하게 옹호하게 된다. 틀렸다고 인정하는 것이 너무 불편하기 때문이다.
결국 AI 민원 증가는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심리의 문제다. 불안, 통제 욕구, 인지 편향이 맞물린 결과다. 기관 차원에서 AI 정보의 한계를 알기 쉽게 안내하는 것은 물론, 공무원들이 근거 있는 설명을 자신 있게 할 수 있도록 심리적 지원 환경을 만드는 것이 필요한 이유다.
AI는 분명 유용한 도구다. 하지만 행정·법률·의료처럼 개별 맥락이 중요한 분야에서는 AI의 답변을 '참고 자료'로만 활용하는 태도가 현명하다. 미국심리학회(APA)는 디지털 도구에 대한 과잉 신뢰가 대인 신뢰를 약화시킨다는 연구 결과를 2023년 공개하며, 온라인 정보와 실제 전문가 조언을 병행해 검토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민원 창구 앞에 앉은 공무원도, 그 앞에 서 있는 민원인도 모두 불안한 인간이다. 다음번에 공공기관을 방문할 일이 생긴다면,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먼저 한마디 건네보는 건 어떨까. '제가 잘 모르겠어서 왔는데, 설명해 주실 수 있을까요'라는 말 한마디가, AI가 내린 어떤 답변보다 더 좋은 해결로 이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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