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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심리학신문=편집부 ]
어제까지 완벽했다. 수천 번 반복했던 동작인데, 오늘따라 손이 떨린다. 공이 어디로 날아가는지도 모르겠다. 무대에 서자마자 외웠던 대사가 통째로 사라지는 배우처럼, 마운드에 오른 순간 스트라이크 하나 던지지 못하는 투수처럼, '입스(Yips)'는 가장 능숙한 순간에 찾아온다.
한화 이글스의 마무리 투수 김서현이 최근 극심한 제구 난조로 강판되면서 '입스' 논란이 다시 수면 위로 올랐다. 입스는 단순한 슬럼프가 아니다. 스포츠 심리학계는 이를 '운동 수행 능력을 마비시키는 심리생리학적 현상'으로 정의한다. 왜 잘하던 사람이 갑자기 무너지는 것일까.
입스(Yips)라는 단어는 1930년대 골프 세계에서 처음 등장했다. 퍼팅 직전 손이 경련처럼 떨리는 증상을 설명하기 위해 쓰였는데, 이후 야구, 테니스, 양궁, 다트 등 다양한 종목에서 비슷한 사례가 보고되면서 스포츠 심리학의 주요 연구 주제가 됐다.
데브 포터 미국 메이요클리닉 스포츠의학과 연구팀이 2000년대 초 골프 선수 1031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연구에서, 전체 응답자의 33%가 입스 증상을 경험한 적이 있다고 응답했다. 경기 경력이 25년 이상인 베테랑 선수일수록 유병률이 더 높았는데, 숙련된 선수일수록 오히려 더 취약하다는 역설적인 결과였다.
이는 '자동화된 동작의 역설'로 설명된다. 수천 번 반복 훈련으로 무의식에 새겨진 동작이 불안이나 압박이라는 외부 자극을 만났을 때 의식적 개입이 끼어들면서 오히려 회로가 엉켜버리는 것이다. 잘 아는 길인데 갑자기 어디가 어딘지 모르게 되는 상황과 비슷하다.
가브리엘 비렌바움 이스라엘 히브리대학교 심리학과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중요한 순간에 발생한 실패 경험은 편도체에 '위협 신호'로 각인된다. 이후 비슷한 상황이 반복될 때마다 편도체는 경보를 울리고, 교감신경계가 활성화되면서 근육이 긴장하고 미세한 협응 능력이 무너진다. 뇌가 몸을 보호하려다 오히려 퍼포먼스를 망치는 셈이다.
야구로 좁혀 보면 더 명확해진다. 마크 베히어 미국 스포츠심리학회(AASP) 공인 스포츠심리사는 투수의 입스를 '실패한 투구에 대한 조건반사적 회피 반응'으로 설명한다. 한 번 폭투가 나온 뒤 포수나 타자를 맞힐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생기면, 공을 던지려는 순간 뇌가 무의식적으로 동작을 방해하기 시작한다.
이 공포 기억이 무서운 이유는 의식적으로 '괜찮아, 잘할 수 있어'라고 다짐해도 좀처럼 지워지지 않기 때문이다. 마치 한번 물린 개를 볼 때마다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처럼, 뇌는 논리보다 감각이 빠르다.
입스를 극복한 선수들에게서는 공통적인 패턴이 발견된다. 닉 알드리스 영국 에식스대학교 스포츠심리학과 교수가 2019년 발표한 연구에서, 입스를 극복한 선수 27명의 회복 과정을 분석한 결과 이들은 '결과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고 동작 자체에 집중하는 법'을 다시 익혔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핵심은 '재루틴화(Re-routinization)'다. 오염된 동작 패턴을 통째로 리셋하고, 처음 배울 때처럼 동작을 의식적으로 분해하고 천천히 재조합하는 과정이다. 골프 황제 타이거 우즈가 전성기에도 스윙을 여러 차례 전면 수정했던 것, 박찬호가 마운드에서 무너졌다가 다시 돌아온 과정도 이 원리와 맞닿아 있다.
마음챙김(Mindfulness) 훈련도 효과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지금 이 순간의 신체 감각에 집중하고 '결과가 어떻게 될까'라는 미래 지향적 불안을 차단하는 연습이, 편도체의 과잉 반응을 서서히 가라앉히는 데 도움이 된다고 알드리스 교수는 설명했다.
사실 입스는 운동선수에게만 찾아오는 낯선 현상이 아니다. 발표를 앞두고 갑자기 머릿속이 하얘지거나, 면접장에서 평소엔 술술 나오던 말이 막히거나, 오랫동안 치던 피아노 곡이 연주회 날 손가락에서 사라지는 경험, 누구나 한 번쯤 겪어봤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입스와 같은 심리적 뿌리를 공유한다.
수행 불안(Performance Anxiety)의 핵심은 '지금 이 순간 잘해야 한다'는 압박이 무의식적 자동화를 방해할 때 발생한다. 다마시오 미국 서던캘리포니아대학교 신경과학과 교수가 제안한 '신체표지가설(Somatic Marker Hypothesis)'에 따르면, 이전의 부정적 경험이 신체 감각으로 저장돼 비슷한 상황에서 자동적으로 회피 반응을 유발한다.
결국 입스를 이겨내는 열쇠는 '완벽하게 해내야 한다'는 집착을 내려놓는 데 있다. 김서현 선수도, 오늘 중요한 발표를 앞둔 당신도, 결과보다 지금 이 순간의 호흡 하나, 동작 하나에 집중하는 것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실패가 쌓인 뇌도, 새로운 경험으로 천천히 다시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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