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부

[한국심리학신문=편집부 ]
아이를 재우고 설거지를 끝내고, 다음 날 아이 준비물을 챙기고 나서야 비로소 내 시간이 생긴다. 그런데 그 시간은 이미 밤 12시. 옆에서 남편은 코를 골며 잔다. '나는 왜 이렇게 혼자인 걸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든 적 있다면, 당신만 그런 게 아니다.
최근 동아일보가 단독 보도한 대만 반도체 기업 사례가 화제다. TSMC 직원들이 장시간 근무하는 동안 배우자가 육아와 가사를 사실상 전담하게 되는 '유사 한부모 가정' 현상이 세밀하게 분석됐다. 한국도 다르지 않다. 고연봉·장시간 노동이 당연한 직장 문화에서, 한 사람이 집안 모든 것을 혼자 감당하는 일은 이미 일상이 됐다.
심리학에서는 이 상태를 '정신적 과부하(cognitive overload)'라고 부른다. 할 일의 목록을 머릿속에 끊임없이 유지하고, 다음 행동을 계획하고, 아무도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처리하는 이 무형의 노동을 '멘탈 로드(mental load)'라고 한다.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상대방은 물론 본인도 얼마나 지쳐 있는지 잘 모른다.
에바 루피 미국 애리조나주립대 심리학과 교수가 2019년 발표한 연구에 따르면, 가정에서 계획·조직·조율 역할을 주로 담당하는 사람일수록 만성적인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솔 수치가 유의미하게 높게 나타났다. 연구팀이 성인 부부 412쌍을 대상으로 분석한 결과, 멘탈 로드의 불균형이 클수록 담당자의 심리적 소진 지수가 최대 38% 높았다.
문제는 이 상태가 오래 지속될수록 단순한 피로감을 넘어 '번아웃'으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번아웃은 에너지만 고갈되는 것이 아니다. 감정적 무감각, 관계에 대한 냉소, 심한 경우 우울증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많은 커플이 처음부터 '당신이 다 해'라고 합의한 게 아니다.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그렇게 됐을 뿐이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기본값 편향(default bias)'으로 설명한다. 별도의 논의 없이 관습적으로 굳어진 역할 분담이 마치 원래부터 그랬던 것처럼 느껴지는 현상이다.
대런 달튼 미국 스탠퍼드대 사회심리학과 연구원은 2021년 부부 580쌍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 흥미로운 결과를 발표했다. 가사·육아 분담을 명시적으로 대화한 커플과 그렇지 않은 커플을 비교했을 때, 대화를 나누지 않은 커플의 83.2%에서 한쪽이 가사의 60% 이상을 담당하는 불균형이 나타났다. 반면 분담에 대해 주기적으로 이야기를 나눈 커플에서는 이 비율이 41.7%로 낮아졌다.
더 안타까운 것은 독박 육아를 하는 당사자들이 상대에게 기대를 접고 스스로 모든 것을 처리하는 '과잉 독립' 패턴에 익숙해진다는 사실이다. 혼자 다 잘 해내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주변에서도 도움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다.
독박 육아·가사가 장기화되면 부부 관계에도 균열이 생긴다. 해리 레이스 미국 로체스터대 심리학과 교수는 1990년대부터 이어온 장기 연구에서 '관계 만족도를 결정하는 핵심 요인'으로 '공정성 인식(perceived fairness)'을 꼽았다. 내가 기여한 만큼 상대도 기여하고 있다는 느낌이 있어야 친밀감이 유지된다는 것이다.
반대로 불공정하다는 감각이 쌓이면 감사함은 서서히 원망으로 바뀐다. 처음에는 '어쩔 수 없지'에서 시작해 '왜 나만'으로 이어지고, 결국 '이 사람이랑 계속 살 수 있을까'라는 질문으로 도달하게 된다. 이 과정이 조용히, 아무도 모르게 진행된다는 점이 더 위험하다.
상대방도 마찬가지다. 배우자가 모든 걸 알아서 잘 처리한다고 느낄수록, 자신의 기여가 없어도 괜찮다는 착각에 빠질 수 있다. '잘 하고 있잖아'라는 생각이 무관심을 정당화하는 방패가 되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거창한 '역할 재분배 협상'보다 작은 대화에서 시작하라고 권한다. 서울대학교 심리학과 최인철 교수는 관계 회복의 출발점으로 '감사 표현의 일상화'를 강조해왔다. 당연하게 여겨져 온 일들, 아이 도시락을 싸고 빨래를 개고 학원 스케줄을 관리하는 일들에 '고마워'라는 말 한마디를 돌려주는 것만으로도 상대방의 심리적 소진 속도가 달라진다.
그 다음 단계는 '보이게 만드는 것'이다. 내가 오늘 한 일을 상대에게 굳이 말하는 게 어색하게 느껴진다면, 공동 가사 앱이나 메모를 공유하는 것도 방법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노동을 눈에 보이게 만들면, 상대방도 비로소 그 무게를 인식하게 된다.
혼자 다 하고 있다는 느낌에 지쳐 있다면, 오늘 저녁 이 한 마디를 꺼내보는 건 어떨까. '나 요즘 좀 힘든 것 같아, 우리 같이 얘기 좀 할 수 있어?' 관계는 대부분 그 짧은 문장 하나에서 다시 시작된다.
다른 곳에 퍼가실 때는 아래 고유 링크 주소를 출처로 사용해주세요.
http://www.psytimes.co.kr/news/view.php?idx=128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