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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심리학신문=편집부 ]
친구들이 새로 생긴 오마카세 레스토랑에 가자고 한다. 1인당 15만 원. 머릿속으로는 이번 달 카드값이 스쳐 지나간다. 예전 같으면 '그날 선약이 있어서'라고 둘러댔을 것이다. 그런데 요즘 Z세대는 다르다. '나 요즘 좀 빠듯해서 패스할게'라고, 그냥 말해버린다.
이것이 바로 최근 Z세대 사이에서 급속도로 번지고 있는 '라우드 버짓팅(loud budgeting)'이다. 예산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조용히 감추는 대신, 소리 내어 공개적으로 선언하는 소비 전략이다. 최근 조사에 따르면 Z세대의 최대 42%가 이 방식을 적극 지지한다고 답했다. 그런데 심리학자들은 이 트렌드 안에서 훨씬 더 깊은 무언가를 발견하고 있다.
오랫동안 돈이 없다는 말은 쉽게 꺼낼 수 없는 고백이었다. 미국 UCLA 심리학과 섈린 졸름스 교수는 2022년 성인 1400명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 재정적 어려움을 숨기는 행동이 사회적 수치심, 즉 '재정적 낙인(financial stigma)'과 직결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응답자의 67%가 돈 문제를 가까운 친구에게도 솔직하게 말하지 못한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비밀은 관계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고립감을 키우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SNS가 일상이 된 세대에게 이 압박은 더욱 강하게 작동해왔다. 화려한 여행 사진, 프리미엄 카페 방문 인증, 한정판 스니커즈 언박싱. 피드를 채우는 이 이미지들은 끊임없이 '나는 충분히 누리고 있는가'를 자문하게 만든다. 캘리포니아대 버클리캠퍼스 심리학과 다허 켈트너 교수는 이를 '사회적 비교 과부하(social comparison overload)' 상태라고 명명했다. 타인의 소비 수준을 실시간으로 확인하는 환경이 만성적 열등감과 과소비를 동시에 유발한다는 것이다.
라우드 버짓팅은 바로 이 지점에서 탄생했다. 수치심의 언어를 뒤집어, 예산 제약을 개인의 실패가 아닌 합리적 선택으로 재정의하는 것이다. '나는 못 사는 게 아니라, 안 쓰는 것'이라는 선언이다.
심리학에는 '자기결정이론(Self-Determination Theory)'이라는 개념이 있다. 미국 로체스터대 심리학과 에드워드 데시 교수와 리처드 라이언 교수가 수십 년에 걸쳐 정립한 이 이론에 따르면, 인간은 자율성, 유능감, 관계성이라는 세 가지 심리적 욕구가 충족될 때 가장 건강하게 기능한다. 라우드 버짓팅은 이 세 가지를 동시에 충족시키는 전략이다. '내가 결정한다'는 자율성, '나는 내 재정을 안다'는 유능감,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 관계'라는 관계성이 모두 담겨 있다.
2024년 영국 에식스대 심리학과 연구팀이 성인 90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연구는 더 구체적인 결과를 보여준다. 재정 상황을 타인에게 솔직하게 공개한 집단은 그렇지 않은 집단보다 재정 관련 불안 수준이 평균 31% 낮았고, 충동 구매 빈도도 28% 감소했다. 말하는 것 자체가 치유였다. 숨기지 않으면, 방어할 이유도 없어지기 때문이다.
물론 라우드 버짓팅이 순수한 심리적 해방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일각에서는 이것이 불안의 또 다른 표현이라는 시각도 있다. 서울대 소비자학과 김난도 교수는 '트렌드 코리아' 시리즈에서 Z세대의 솔직한 소비 언어가 경제적 불확실성에 대한 집단적 방어기제이자 연대의 언어로 동시에 작용한다고 분석했다. 혼자 힘든 것이 아니라는 확인이 필요한 세대라는 것이다.
라우드 버짓팅의 핵심은 결국 거절이다. 그리고 거절은 오랫동안 인간에게 가장 어려운 행동 중 하나였다. 미국 컬럼비아대 사회심리학과 바네사 보닝스 교수의 2021년 연구에 따르면, 사람들은 경제적 손실보다 '거절로 인한 관계 훼손'을 더 강하게 두려워하는 경향이 있다. 특히 한국처럼 집단주의적 문화권에서는 이 경향이 더 뚜렷하게 나타난다. '혼자 빠지면 분위기 깬다'는 압박이 불필요한 소비를 지속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라우드 버짓팅은 이 불편한 거절을 '공유 가능한 논리'로 포장한다. '나 돈 없어'라는 말 한마디가 상대방의 반박을 무력화하는 완벽한 방어막이 된다. 도쿄대 사회심리학 연구팀이 2023년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경제적 이유를 명시적으로 언급한 거절은 모호한 이유를 댄 거절보다 상대방이 더 쉽게 수용하고, 관계 만족도에도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솔직함이 오히려 관계를 보호하는 셈이다.
당신도 혹시 지금 '가야 할 것 같은' 모임 때문에 지갑이 얇아지고 있지는 않은가. 라우드 버짓팅은 단순한 유행어가 아니라, 수십 년간 우리가 억눌러온 솔직함을 꺼내도 괜찮다는 집단적 허락일지도 모른다.
라우드 버짓팅을 실천하는 데 긴 설명은 필요 없다. '이번 달 예산이 빠듯해서 패스할게', '나는 요즘 씀씀이를 조금 줄이는 중이야', 이 한 문장이면 충분하다. 스탠퍼드대 행동심리학 연구에 따르면, 구체적인 이유를 제시하는 거절은 인간관계에서 오히려 신뢰도를 높이는 효과가 있다. 변명이 아니라 자기 개방(self-disclosure)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이 말을 부끄러움 없이 할 수 있는 내면의 허락이다. 타인의 소비 속도에 나를 맞추는 것이 의무가 아니듯, 내 재정 현실을 솔직하게 말하는 것은 실패의 고백이 아니다. 문득 이번 주말 모임 초대 메시지가 부담스럽게 느껴진다면, 그냥 솔직하게 말해보는 것은 어떨까. '나 이번엔 좀 아끼는 중이야, 다음에 보자.' 그 한 마디가 당신의 지갑도, 마음도 가볍게 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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