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부

[한국심리학신문=편집부 ]
어느 날 갑자기 모르는 사람 이름과 함께 20만 원이 통장에 들어왔다. 분명 내가 받을 돈이 아닌데, 계좌번호가 맞는 걸 보면 착오 송금 같기도 하다. 돌려줘야 하나, 신고해야 하나 고민하는 사이, 이미 통장은 정지됐다.
최근 이런 황당한 피해를 호소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자신은 아무것도 한 적 없는데 금융 사기범의 공범으로 의심받고, 일상이 통째로 멈춰버리는 경험이다. 대체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걸까. 그리고 우리는 왜 이 상황에서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는 걸까.
보이스피싱 조직이 최근 즐겨 쓰는 수법 중 하나가 바로 '무작위 소액 송금'이다. 피해자의 계좌번호를 입수한 뒤 일부러 소액을 입금해 두고, 나중에 '내 돈이 잘못 들어갔다'며 다른 계좌로 이체를 요구한다. 실제로 중앙일보 등 다수 매체가 보도한 사례에서, ㄱ씨는 아무 연락도 받지 못한 채 금융감독원으로부터 전자금융거래 제한 통보를 먼저 받았다.
피해자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부분은 '내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다'는 감각의 혼란이다. 범행에 가담한 적도, 돈을 쓴 적도 없는데 경찰 조사와 이의 신청이라는 긴 싸움을 홀로 감당해야 한다. 통장이 묶이면 월급 이체, 공과금 납부, 카드 결제까지 일상 전체가 마비된다.
심리학적으로 보면, 이 상황에서 사람들이 즉각 대처하지 못하는 데는 뚜렷한 이유가 있다. 대니얼 카너먼 미국 프린스턴대 심리학과 명예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인간은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빠른 직관적 판단보다 상황이 명확해지길 기다리는 '현상유지 편향'을 강하게 보인다. '어차피 착오 송금이겠지, 알아서 다시 빠져나가겠지'라고 생각하며 행동을 미루는 것이다.
여기에 '인지 부조화'도 작동한다. 레온 페스팅거 미국 스탠퍼드대 심리학과 교수가 정립한 인지 부조화 이론에 따르면, 사람은 자신의 행동과 믿음이 충돌할 때 불편함을 줄이기 위해 현실을 왜곡해서 해석하려 한다. '나는 나쁜 일을 한 적 없으니 별일 없을 것'이라는 믿음이 '지금 당장 신고해야 한다'는 행동을 방해하는 셈이다.
실제로 2023년 금융감독원이 발표한 보이스피싱 피해 실태 자료에 따르면, 피해자의 61.3%가 이상 징후를 인지하고도 즉각 신고하지 않고 하루 이상 상황을 지켜봤다고 응답했다. 빠른 대응이 피해를 줄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심리적 지연이 피해를 키우는 구조다.
계좌가 정지됐다는 통보를 받는 순간, 피해자들은 단순한 불편함을 넘어 강렬한 무력감을 경험한다. 마틴 셀리그만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심리학과 교수가 제안한 '학습된 무력감' 개념이 이 상황에 그대로 적용된다. 아무리 해명해도 금융 기관과 수사 기관이라는 거대한 시스템 앞에서 자신의 말이 먹히지 않는다고 느낄 때, 사람들은 점점 대응을 포기하게 된다.
한국소비자원이 2024년 진행한 금융 피해 심리 조사에서 무작위 입금 피해를 경험한 응답자의 74.2%가 '내가 뭔가 잘못한 것 같은 죄책감'을 느꼈다고 답했다. 가해자가 없는 피해임에도 스스로를 자책하는 이 반응은, 인간이 통제감을 잃었을 때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으려는 귀인 편향에서 비롯된다.
이런 심리 상태가 지속되면 사회 전체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진다. '은행도 못 믿겠다', '경찰에 신고해봤자 소용없다'는 냉소가 쌓이는 것이다. 범죄 조직이 개인의 통장을 악용하는 일이 반복될수록, 피해자의 심리적 상처는 물질적 피해보다 훨씬 오래 남는다.
전문가들은 이런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즉각적인 기록과 신고'라고 입을 모은다. 모르는 돈이 들어왔을 때 절대 손대지 않고, 은행 고객센터와 금융감독원(1332), 경찰청 사이버범죄신고시스템(ecrm.police.go.kr)에 즉시 알려야 한다. 내가 먼저 신고한 기록이 있어야 공범 오해를 피하는 데 결정적으로 유리하다.
심리적으로도 '내가 아무것도 안 했다'는 사실을 기록으로 확인하는 것 자체가 무력감을 줄여준다. 조슈아 이만 미국 콜로라도대 심리학과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위기 상황에서 작은 행동이라도 직접 취한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이후 불안 수준이 38%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기다리는 것'보다 '움직이는 것'이 마음을 지키는 방법이다.
오늘 당장 내 스마트뱅킹 앱을 열어 최근 입출금 내역을 한 번 훑어보는 건 어떨까. 낯선 입금 하나가 삶 전체를 흔들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이미 한 발 앞서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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